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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두현 시인 / 빈 자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6.

고두현 시인 / 빈 자리

 

 

열네 살 봄

읍내 가는 완행버스

먼저 오른 어머니가 남들 못 앉게

먼지 닦는 시늉하며 빈 자리 막고 서서

더디 타는 날 향해 바삐 손짓할 때

 

빈 자리는 남에게 양보하는 것이라고

아침저녁 학교에서 못이 박힌 나는

못 본 척, 못 들은 척

얼굴만 자꾸 화끈거렸는데

 

마흔 고개

붐비는 지하철

어쩌다 빈 자리 날 때마다

이젠 여기 앉으세요 어머니

없는 먼지 털어가며 몇 번씩 권하지만

 

괜찮다 괜찮다, 아득한 땅속 길

천천히 흔들리며 손사래만 연신치는

그 모습 눈에 밟혀 나도 엉거주춤

끝내 앉지 못하고.

 

 


 

 

고두현 시인 / 남해 마늘

 

 

보리밭인 줄 알았지

하늘거리는 몸짓

그 연하디 연한 허리 아래

매운 뿌리 뻗는 줄 모르고

어릴적엔 푸르게 보이는 게

다 보리인 줄 알았지

 

배고프단 말 못하는 것들

발밑에서 그토록 단단한 마디로

맺힌다는 것

땅속으로 손비집고

문질러보기 전에는 왜 몰랐을까

눈물이 어떻게 소금보다 짠지

네가 왜 푸른 잎 속에 주먹밥 말아 쥐고

바닷가 밭고랑에 뜨겁게 서 있는지

 

 


 

고두현(高斗鉉) 시인

1963년 경상남도(慶尙南道) 남해(南海)출생.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3년『중앙일보(中央日報)』신춘문예에 시「유배시첩(流配詩帖)」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늦게 온 소포』『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가 있으며, 2005년 제10회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 수상했다. 1988년부터『한국경제신문(韓國經濟新聞)』기자로 근무하고 있으며, 현재, 문화부 차장으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