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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 56억 7천만년의 고독
21세기는 우리를, 마약과 동성애와 근친상간과 싸운 바보스러운 세대라고 기록할 것이다 聖과 俗과 천국과 지옥의 잠 속에서 나는 그대를 추모하지 않는다 당신은 꽃과 비의 정원에서 무엇인가에 불리어가는 듯한 썰물의 흉한 가슴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모든 죽음들에서, 입에서 항문까지 비로소 내장된 세상이 환하게 보인다 기껏 보살펴주었더니 몸이 나를 배반한다 바람에 담쟁이덩굴이 온 집을 흔들어놓고 당신은 안개꽃을 먹으세요 나는 장미꽃을 다 먹어치우지요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내일 신문에 코를 박고 방금 자신들이 떠나온 세상의 풍경들을 읽어내며 간단없을 생을 수군거립니다 권태롭듯이 아버지가 실내 낚시터에서 돌아오지 않고 형은 노래방에서 하루종일 살았습니다 적막강산―, 오늘은 비가 징벌의 연대기처럼 내려 萬化方暢의 정원에서 식구들은 내 머리에 자라 있는 무성한 숲을 보고 놀라 시퍼런 낫을 들고 쳤지마는요 나는 늘 시원했습니다 나도 뜨겁거나 차지 않은 것들은 모두 내 입 밖으로 뱉어버리겠습니다 당신의 그 지루한 기다림만큼 아무것도 제시할 수 없는 이 위증의 세계에서 나도 그댈 겁나게 기다립니다 당신은 오래 꽃과 비의 정원에서 서 계세요 나는 넘치는 술잔을 들고 삼독번뇌의 바람을 기다리지요
함성호 시인 / 오지 않네, 모든 것들
나 은행나무 그늘 아래서 142번 서울대―수색 버스를 기다리네 어떤 날은 나 가지를 잘리운 버즘나무 그늘 아래서 72-1번 연신내행 버스를 오래도록 기다리고 그녀의 집에 가는 542번 심야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린 적도 있네 앙상한 가로수의 은밀한 상처들을 세며 때로는 선릉 가는 772번 버스를 수없는 노래로 기다리기도 하네 그러다 기다림의 유혹에 꿈처럼 143번 버스나 205-1번 혜화동 가는 버스를 생으로 보내버리기도 하고 눈 오는 마포대교를 걸어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나 실연의 시를 적기도 했다네 어느 한 날은 205번 버스나 50-1번 좌석버스를 깊은 설레임으로 기다린 적도 있었지만 그 짧은 연애를 끝으로 눈 내리는 날에서 꽃이 피는 날까지 그런 것들은 쉽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네 패배를 기억하게 해주는 것들, 이를테면 성남에서 영등포까지, 홍등이 켜진 춘천역 앞을 지나던 그 희미한 버스들을 이제 나는 잊었네 나 푸른 비닐 우산의 그림자 안에서 기다림의 끝보다 새로운 기다림 속에 서 있음을 알겠네 오늘도 나 147번 화전 가는 버스나 133-2번 모래내 가는 버스를 기다리네 이제는 더 이상 부를 노래도 없고 어느 누구도 나의 기다림을 알지 못하네 오지 않네, 모든 것들 강을 넘어가는 길은 멀고 날은 춥고, 나는 어둡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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