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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정 시인 / 하모니카 부는 오빠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7.

문정 시인 / 하모니카 부는 오빠

 

 

오빠의 자취방 앞에는 내 앞가슴처럼

부풀어 오른 사철나무가 한그루 있고

그 아래에는 평상이 있고 평상 위에서는 오빠가

가끔 혼자 하모니카를 불죠

나는 비행기의 창문들을 생각하죠, 하모니카의 구멍들마다에는

설레는 숨결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이륙하듯 검붉은 입술로 오빠가 하모니카를 불면

내 심장은 빠개질 듯 붉어지죠

그때마다 나는 캄보디아를 생각하죠

양은 밥그릇처럼 쪼그라들었다 죽 펴지는 듯한

캄보디아 지도를 생각하죠, 멀어서 작고

붉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오빠는 하모니카를 불다가

난기류에 발목 잡힌 비행기처럼 덜컹거리는 발음으로

말해주었지요, 태어난 고향에 대해,

그곳 야자수 잎사귀에 쌓이는 기다란 달빛에 대해,

스퉁트랭, 캄퐁참, 콩퐁솜 등 울퉁불퉁 돋아나는 지명에 대해,

오빠의 등에 삐뚤빼뚤 눈초리와 입술들을

붙여놓은 담장 안쪽 사람들은 모르죠

오빠의 하모니카 소리가 바람처럼

나를 훅 뚫고 지나간다는 것도 모르죠

검은 줄무늬 교복치마가 펄렁, 하고 젖혀지는 것도

영원히 나 혼자만 알죠

하모니카 소리가 새어나오는

그 구멍들 속으로 시집가고 싶은 별들이

밤이면 우리 집 평상 위에 뜨죠

오빠가 공장에서 철야작업 하는 동안

별들도 나처럼 자지 않고 그냥 철야를 하죠

 

- 문정 유고 시집 <하모니카 부는 오빠> 2014

 

 


 

 

문정 시인 / 산벚나무의 조문

 

 

  숨을 깔딱이는 그늘이 측은했다

  산벚나무의 첫 조문은 조금 말랑해진 3월의 숲에서였다

  조문은 땅에 떨어진 나뭇잎들로부터였다

  나뭇잎들이 정말 검게 바삭거렸고

  산길에 닿아 꿈틀거리던 나무줄기도

  더 이상 길을 밟아나가지 못했다

  산벚나무가 붓을 들어 조사(弔辭)를 차곡차곡 써내려갔다

  한 문장 두 문장 기술한 조사가

  꽃상여 한 채를 만들고, 허공을 잘라 먹었다

  살갗으로는 좁쌀만한 눈물이 톡톡 솟아났다

  눈물이 퍼렇게 번져나갈수록

  밤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골바람이

  산벚나무의 얼굴을 식혀주었다

  한순간, 잎사귀의 핏줄이 위태롭게

  걸어나가는 길까지도 그려주던, 잇고 이어온

  그 깊은 속이 뭉텅뭉텅 터져 나왔다

  산벚나무는 꽃상여도 주저앉아버린

  빼곡한 그늘을 가졌고

  어느새 뒤를 돌아보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문정 시인 / 실크로드

 

 

서역나라에서 온 당신과 이 땅의 나

전라도 무진장 산협 어둠에 갇혀서

별들에게 가는 길도 막혀서

나는 당신에게 동쪽어깨를 기대어가고

당신은 나에게 서쪽어깨를 기대어오고

더하여 조금 큰 나는 어깨마루로 당신을 받쳐 올려가고

더하여 조금 작은 당신은 머리를 어깨마루에 기대어오고

마치 강심과 천상이 만난 물낯 같아서

정말로 높이도 깊이도 모르는 거울 같아서

높은 강심에서 천상으로 깊은 천상에서 강심으로

띠처럼 밀려가고 밀려오는 유성우

까마득한 허방 길이어서

하늘이 강물이 한소끔 몸을 부르르 떨며 흐른 듯

당신은 동쪽어깨를 길게 뻗어서 돌아오고

나는 서쪽어깨를 길게 뻗어 돌아가서

외로운 달의 달이 되어버린 지구(地球)를 감싸 안고

손바닥 그늘골들로

짜나가는 한 필 아침비단,

이제는 전라도 무진장 산협 햇빛에 갇혀서

 

 


 

 

문정 시인 / 안개

 

 

삶보다 시가 아득해지는 밤

잠들지 못하고

어두운 하늘에다가

별을 달아 보기도 하다가

달아놓고 닦아 보기도 하다가

달을 덜컹덜컹 굴려 보기도 하다가

이 공허한 그림은

예술이 아니라고

새벽까지 아득하게 주저앉다 보면

이 세상 다 작파해 버리고

백지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백치처럼,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 많다

 

 


 

 

문정 시인 / 개기월식

 

 

두 마음 포개면 노을이 붉어진다는데

 

여름과 가을이 손잡고 있던 화단에 석류 붉어졌다

 

달은 지구의 품에 안기고 싶어서

웅크려 턱 괴고 앉아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며칠 굶고 홀쭉해진 날에는

고개 들 수 없어 해와 별 다 지워버렸다

 

어느 날부터는 사그라지지 못해 창백했다

가지 않는 달력을 둘둘 말아 공처럼 굴렸다

 

외눈박이 지구의 사랑은 태양에게로만 향했다

차오른 달을 지구는 알지 못하고

달은 길게 드리워진 지구의 그늘에 몸이 잠긴다

 

석 달도 아닌 십 년 만에

잠시 달의 얼굴로 설레는 홍조가 지나갔다

 

 


 

문정 시인(문정희 1961-2013)

1961년 전북 진안에서 출생. 전북대학 국문학과 졸업.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하모니카 부는 오빠〉가 당선되어 등단. 2012년 제1회 '작가의 눈 작품상' 수상. 유고시집<하모니카 부는 오빠>. 전주 우석고 국어교사. 2013.09.11 심장마비로 별세.(향년 5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