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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원 시인 / 거품이다
단풍의 생각을 지우려는데 동작순서가 낯설다. 바람이 된 머리카락과 지도가 새겨진 발바닥, 구겨진 어깨를 넣고 동전과 나무 두 그루, 생각 없이 넣어버렸다. 단풍 이전으로 돌린다. 무슨 꿍꿍인지 거품만 돌아간다. 하늘은 점점 올라가고 헹궈도 헹구어도 사라지지 않는 비둘기, 날개를 쉬지 않고 퍼덕인다.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탈수된 기차가 엉겨있다. 풀어도 꼬이기만 하고 지도는 부풀어 세탁조 가득 뜬구름이다. 문을 열면, 분홍코끼리가 거품이 되다니, 너의 사랑도 거품이 되다니, 갈맷빛 눈들이 거품이 되다니. 노을의 순간도 거품, 어제 산 보석신발도 거품, 어디에도 갈 수 없는 발바닥, 둥근 창 안의 세계는 헛것이다. 띵 똥, 단풍을 다 지웠노라 알람이 울리는데 미끄러지는 방울들, 끄집어 낼 무엇도 잡히지 않는다. 버튼을 눌러 기억을 더듬어간다. 놓친 순간은 되돌릴 수 없어 중심을 다시 세탁해야 하는 날, 머릿속 거품 빼는데 24시간.
김나원 시인 / 금오도
소가 금오도를 갈아엎고 있다
늘어진 시간을 잡아당기는 촌부 제대로 묻어야 싹이 내린다
어제와 오늘사이 천 길 낭떠러지 이어주는 비렁다리
갈바람통으로 바람은 숨어들고 바다는 벼랑길을 돌아서가고
뱃고동이 섬을 밀어 낸다 배에 묶인 줄이 풀리자 움직이는 초침
갑판으로 오르는 트럭에 육지로 팔려가는 송아지 한 마리 어린 귀에 금오도가 달려있다
맥없이 커다란 눈에 눈물 자국 선명하다
떠날 시간은 오고야 만다 직포 항에 떠도는 송아지 울음 어미 소는 일하다 먼 바다를 바라본다
김나원 시인 / 자전거를 훔치다
봄을 훔치기로 했다 어디까지 가다 돌아와야 하는지 폐달은 매끄럽게 감겼다
가슴이 사라졌다 나는 봄 속을 마구 달려 물오른 버들가지 속으로 들어갔다
휘어지는 비포장도로 노란 코로나택시가 지나가자 마을까지 먼지터널이 만들어진다 먼지 속을 달리면서 인사성 밝은 아이를 만난다
수도가 들어왔지만 그때 길어먹던 우물은 지금도 솟고 있는데 고요한 물은 흘러넘쳐 생각 속의 길을 적시는데 물소리는 귓가에 흐르고 있는데 마을은 기도중인데 꿈을 깨는 안내방송 담장을 넘는 도둑고양이 봄을 물고 늘어진다 살구꽃의 화사한 웃음은 골목에 흩날리는데 아지랑이는 보고도 못 본 척 나는 봄을 열고 더 봄 속으로 봄 속으로
돌부리를 피하려다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강을 거슬러 달리는 나는 계절에 없는 사람 꿈인가 세상에서 잊혀진 9시 뉴스인가 미세한 기운들이 흔들렸지만 이미 봄을 지나왔다
자전거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라진 방향으로 나를 쫓아간 것 목련은 아직 그 자리 그대로 입을 봉하고 훔친 자전거를 낙동강 언덕에 세워두었다
김나원 시인 / 흔들리는 사랑은 아름답다
풀잎들은 매일 흔들린다 그리움이라는 것을 가슴에 간직한 채 빗물을 햇살로 껴안으며 아픔마저 고귀한 성지를 만든다
풀잎은 제자리인 듯해도 매일 걷고 또 걷는다 발이 부르트고 짓무를 때까지 햇살이 상처를 다독이고 꽃들의 열매가 들릴 때까지 하루를 별처럼 내려놓는다
아침의 이슬을 머금은 파란 얼굴은 피아노의 선율을 선사한다 욕망의 선을 잘라버린 아가의 눈빛처럼 아침의 노래는 신선하다 성경말씀보다 더 강렬하고 샘물처럼 맑다
풀잎들은 꽃을 피워낸다 사랑이라는 고통을 안은 채 먹구름을 살라먹고 깨끗한 종소리로 걸어가기 위해 조용히 제 몸을 흔들리며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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