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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정 시인 / 산동네 야경은 포구로 변한다
한동안 객지를 떠돌다 온 부랑자처럼 산등성이에 앉아 저무는 마을을 내려다본다 해안선을 따라 속속 항구로 들어오는 어선들처럼 조금은 수척해진 불빛을 데리고 집들이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온종일 겨드랑이 깊숙이 품어두었던 매서운 풍파를 어둠속에 풀어놓으며 흩어졌던 빛들 서둘러 촘촘해지는 저녁 어쩌면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얼굴들이 저 아랫마을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다 가끔 내 머릿속에서 행성으로 떠돌거나 오래전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갔다고 믿었던 별들, 어느 순간 문득문득 떠오르던 얼굴들이 오늘밤 기억의 창마다 환히 불을 밝힌다 아주 오랜만에 밝아지는 나의 포구 그 동안의 항해가 너무 길었던가 수심처럼 깊어진 눈으로 불빛을 세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발길을 위해 가로 등대가 깜빡깜빡 신호를 보내고 있다
문세정 시인 / 예수를 리메이크하다
그는 늘 트로트 찬송가를 부르며 나타난다 목에 걸린 소형 녹음기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지하철 4호선 구간을 뱅뱅 돈다 칸칸마다 음표처럼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하루 종일 연속 재생되는 그의 노래 언젠가, 눈앞이 온통 암흑으로 변하고 자기도 모르게 목울대가 약해지고부터 그의 찬송가는 트로트 버전이 되었다 <샤론의 꽃 예수><샤론의 꽃 예수>를 4분의 4박자로 꺾었고 흥겨운 대목에선 바이브레이션을 넣기도 했다 한 소절 한 소절 깜깜한 세상을 귀로 읽으며 새 음표를 붙이고 장조를 바꾸다 보면 아주 가끔씩 바구니 속으로 떨어지는 동전소리도 그의 귀엔 취타악기음으로 들렸다 퇴근길 풀죽은 몸들을 싣고 지루한 음보로 달리고 있는 객차 안 아주 느린 몸동작으로 악보를 넘기듯 다음 칸을 향해 그가 나를 지나쳐 가고 중간 중간 박자를 놓친 지하철이 황급히 허리를 틀며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시인세계》2005년 신인상 당선작 中
문세정 시인 / 내 마음의 연약지반구역
서해포구 월곶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처럼 내 마음에도 무르고 약한 땅이 있습니다 심장을 중심으로 반경 5cm지점은 언제나 진흙입자들로 덥혀있어 무게를 버티는 힘이 매우 약하답니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슬픔이 그 지점을 통과할 때엔 강도 3.0이상의 지진이 일어 정신을 잃을 만큼 전신이 흔들리기도 하고요, 한번 내려앉은 지반을 복구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답니다 네,그럼요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죠 자칫하면 당신이나 나나 대책없이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나를 통과하려거든 먼저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마음속도계를 조절해가며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해요 물이 흐르는 대로 순순히 몸을 내맡기는 나뭇잎처럼 당신과 나의 숨결이 맞닿아야 해요 그 순간만큼은 지나간다는 생각조차 내려놓은 채 한 호흡으로 지나가야하는 내 마음의 습지,그대가 무심히 던진 말 한마디에도 쉽게 무너져내리는.
-2005년 시인세계 신인상 수상작품중-
문세정 시인 / 불심검문을 받다
그를 면회하고 돌아 나오는 밤길 안양교도소 담장은 한층 높고 튼튼해져 있었다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라포르스 성벽처럼 높이 솟아오른 공중탑과 지상 곳곳에서 완전무장을 한 눈들이 바람의 움직임까지 감시한다 감시의 눈길은 어느새 내 걸음걸이를 고치게 만들고 공연히 주위를 살피게 하고 폭풍 전야처럼 제 스스로 내부 단속에 들게 한다 교도소 안에서만큼은 바람조차도 말수를 줄이고 차분해져야 한다는 걸 순순히 몸을 낮춰야 한다는 걸 이미 터득한 것일까 한 걸음 한 걸음 어둠을 가두어 나가는 담장 아래
지금까지 용케도 법망을 피해가며 살아온 나를, 매순간 알게 모르게 불안했던 내 행적을 담장 가로등이 또박또박 조명한다 거리를 좁히며 더욱 끈질기게 따라붙는 불빛레이더, 습관처럼 외투깃을 세우며 위장해보지만 오늘따라 분명하고도 마땅한 알리바이가 떠오르지 않아 자꾸만 시선이 흔들리는 저녁
정작 감시와 단속이 필요한 곳은 적막에 든 교도소 안쪽이 아니라 바로 내가 서 있는 이곳, 시끌시끌한 담장 바깥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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