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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주 시인 / 직육면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8.

이정주 시인 / 직육면체

 

 

집이란 공중에 그은 실선이다

직육면체 모서리 실선 안팎으로 들락거리면서

나는 안심한다

날이 선 칼로 고기를 자르고

찌개를 끓인 뒤

공중에 떠 있는 직사각형 실선―탁자 위에서

밥을 먹는다

직육면체 속이 김으로 꽉 찬다

나는 안심한다

옷을 벗어던지고 거웃을 드러낸 채 잠을 잔다

허공에 직육면체의 붉은 선이 깜빡이고 있다

 

집이란 공중에 그은 실선이다

실선 안팎으로 들락거리면서 나는 분개한다

날이 선 칼로 공간을 여러 개로 나눈 뒤

집값 올린 놈들을 불러낸다

놈들이 자다가 불려 나온다

놈들을 작은 공간들에 밀어 넣는다

멋진 관들이 실선 안에 빼곡하다

나는 깜빡이는 선을 자른다

집이 흩어진다

공중에 축포가 터진다

재개발이다

끌려 나왔던 놈들은 더 큰 집으로 옮겨 갔다

나는 쥐었던 칼을 놓는다

칼은 낙엽처럼 떨어져 내려갔다

 

집이란 변명이다

변명이 끝나면 직육면체는 더 이상 깜빡거리지 않는다

밤새 철거 장비들이 소리 없이 다가와 있다

 

 


 

 

이정주 시인 / 시계

 

 

시집간 지 몇 년 만에

현수가 온다고 했다

나는 벽시계를 떼어 세탁기 속에 넣고

괘종시계는 싱크대 서랍에 넣었다

현수는 이전보다 빨리 옷을 벗었다

말없이 누워 있던 현수는 라디오를 껐다

그 목소리 싫어

라디오 속의 남자가 사라지고

숨 막히는 고요가 찾아왔다

나는 현수에게 기어갔다

현수는 많이 젖어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강물이 되어

저만치 번득거리며 흘러갔다

내가 강에 이르기도 전에

강물은 꼬리를 감추며 멀어져 갔다

목이 말랐다

찬물을 나누어 마시고 우리는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현수는 내 가슴에 귀를 갖다 대었다

여기 있었군요

언제 몸속에 시계를 숨겼어요?

현수는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시집『아무래도 나는 육식성이다』(2014)에서

 

 


 

 

이정주 시인 / 물리치료

 

 

여자는 내 어깨 아래 핫백을 밀어 넣는다

나는 데워진다

따뜻하고 어지럽다

여자는 내 어깨에 멘소레담을 바르고 근육들을 만진다

시원하고 아프다

여자는 내 어깨에 전극을 붙이고 스위치를 올린다

찌릿찌릿하고 간지럽다

여자는 물리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미진하다

이 통증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내 팔은 다른 것을 찾고 있다

지난여름의 돌을 더듬고 있다

돌에 걸려 넘어져 얼굴이 처박혔던

백사장을 더듬고 있다

얼굴 쳐들고 하늘로 뿜었던 욕설을 그리워하고 있다

옆에서 박수치며 웃던 여자를 그리워하고 있다

 

나는 여자에게 인사한다

여자는 나를 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다

여자는 이미 다른 사람을 데우고 있다

 

목이 마르다

하늘에 맑은 물 한 잔과

붉은 알약 하나가 떠 있다

 

 


 

 

이정주 시인 / 인사

 

 

내가 잘 가세요 했더니 그 아저씨는 아무 탈없이 산을 넘어갔다. 내가 잘 가세요 했더니 그 아주머니는 아무 탈없이 강을 건너갔다. 내가 잘 가 했더니 그 계집애는 무사히 바다 너머로 갔다. 바다 건너서 흔든 계집애의 손바닥이 반짝반짝 파도쳐 이쪽으로 밀려왔다. 산이 강을 덮쳐도 아무 소리 나지 않았다. 고목에 등을 기대고 서서 잘 가세요 했더니 그 할아버지는 무사히 별자리 건너로 가셨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잘 가 하고 울먹였더니 그 친구도 무사히 밤하늘에 도착했다.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별빛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정주 시인 / 종이여자

 

 

나는 종이여자의 몸에 글을 썼네, 여자는 온몸을 뒤틀며 내 글을 받았네.

가슴을 지나 엉덩이를 거쳐 발바닥까지 글을 썼네. 더 쓸 데가 없었네.

나는 만년필을 던져 버렸네. 그리고 쓰러져 버렸네. 아침에 여자의 몸은 깨끗해졌네.

밤새 새겼던 글들이 지워졌네. 여자는 나를 보고 뽀얗게 웃었네.

창 밖에서 강물이 잉크 색으로 출렁거리고 있었네. 나는 여자에게 다가갔어.

그리고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네. 여자는 손으로 내 등을 토닥거렸네.

나는 내 몸이 맑아지는 걸 느꼈네. 강가에는 바람이 자라고 있었네.

나도 종잇장처럼 가벼워졌네. 나는 여자를 안고 크게 웃었네.

여자도 웃었네. 웃음 끝에 눈물, 어제 썼던 이야기가 내 눈에서 파랗게 번져 나왔네.

 

 


 

이정주 시인

1953년 경남 김해에서 출생. 부산대학교 약대 약학과 졸업.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외국문학》 편집장 및 출판사 편집장 역임. 시집으로 『행복한 그림자』, 『문밖에 계시는 아버지』, 『의심하고 있구나』, 『홍등』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