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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경선 시인 / 옆구리 증후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4.

조경선 시인 / 옆구리 증후군

 

 

손가락을 때렸다 매일 하는 일인데

못은 이미 달아나고 의자는 미완성인데

날아 온 생각 때문에 한눈팔고 말았다

상처 많은 나무로 사연 하나 맞추어 간다

원목의자만 고집하는 팔순의 아버지에게

때로는 딱딱한 것도 안락함이 되는 걸까

어머니 보내고 생의 척추 무너진 후

기우뚱 옆구리가 한 쪽으로 기울어져

슬픔을 지탱하기엔 두 다리가 약하다

낯익은 것 사라지면 증후군에 시달린다

최초의 의자는 흔해빠진 2인용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익숙할 때 놓친다

 

* 2016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조경선 시인 / 배웅

 

 

아버지 묻고 내려가는데 헛기침 들린다

돌아보니 노인 하나 웅크리고 앉아서

맨살의 마른 알몸을 붉은 노을에 씻고 있다

 

임종을 혼자 지켰다는 듯 귀신새가 운다

유언을 토했을 땐 아무도 없었다

쏟아낸 암 덩어리 움켜쥐고 한 사내 저물었다

 

저 북쪽 어딘가에서 봄꽃이 다시 피고

30대의 모습 그대로 어머니가 손짓한다

먼 곳이 반세기 만에 가까운 곳 되려한다

 

못난 아들 발걸음이 팍팍하게 무너진다

아는지 모르는지 들꽃의 처연이 깊다

그 어떤 설움으로도 배웅이 될 수 없는데,

 

* 2014 천강문학상 수상작

 

 


 

 

조경선 시인 / 목력(木歷)

 

 

자르기 전 쓰다듬으며 나무를 달랜다

생의 방향 살핀 후 누울 자리 마련한다

첫 날刀은 이파리마저 놀라지 않게 한다

 

나이테 한 줄 슬금슬금 잘려 나가니

뱉어낸 밥 색깔이 뼛가루처럼 선명하다

100년의 단단한 숨소리 한순간에 무너지고

 

한없이 차오르던 숨길은 물길이었을까

안쪽으로 파고들면 내력은 촘촘해지고

울음을 간직한 옹이가 더욱 단단해진다

 

벌목은 베는 게 아니라 만나는 거다

커다란 눈동자 되어 밑동이 살아있는 건

최초의 뿌리가 사람을 지켜보기 때문이다

 

*2019년 김만중문학상 신인상 수상작 시집 <목력木歷>으로 수상

 

 


 

 

조경선 시인 / 폭우

 

 

토담집 처마 밑 발자국이 깎여 나간다

거미가 쳐놓은 사다리를 삼켜버리고

바람은 방향을 찾지 못해 문을 후려친다

 

빗물이 꼬리를 세워 흙의 비밀을 파고들 때

실족한 오른발은 붉은 피를 파먹는다

한 계절 낱낱이 파헤쳐진 헛소문부터 살냄새까지

 

너는 나에게로 나는 너에게로

그 사이 당신이라는 좌절이 쏟아진다

걸음에 묻어 있던 흙냄새가 허공에서 갈라진다

 

 


 

 

조경선 시인 / 오랜만에 땅 위에서

 

 

오랜만에 땅 위에서 팔굽혀펴기 동작을 한다

어둠까지 다 털어먹고 두 발로 떠돌다가

오늘은 네 발로 나를 그야말로 드는 것이다

닫혔던 코를 바닥에 대고 흙냄새를 맡는다

어금니 물고 일어나 폭삭 흙에 파묻힌다

으랏차 옆을 보아도 앞을 보아도 벽이 없다

 

시집 <목력木歷> 책만드는 집 2017

 

 


 

 

조경선 시인

1961년 경기도 고양에서 출생. 경희대 대학원 행정학과를 졸업. 2012년 《포엠포엠》에 시로  등단, 201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으로 『목력』이 있음. 2014년  시흥 문학상, 천강문학상 수상. 2019년에는 시집 <목력木歷>으로 김만중문학상 신인상을 수상. <오늘의시조시인회의> 회원이며 <시란>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