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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혜신 시인 / 자명종 -새벽 6시 30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4.

임혜신 시인 / 자명종 -새벽 6시 30분-

 

 

하루밤 사이, 직장도 그만두고 주식도 팔고 집도 팔고 차도 팔고 아내도 버리고 갑자기 농부가 되고 싶다던 사람, 흙의 몸, 흙의 영혼, 그 더러운 눈과 코와 가슴과 손과 사랑에 빠져서 언젠가는 달아나 버리겠다고 다짐하던 사람, 한 번 달아나면 여차한 경우를 위한 비상의 날개가 잘 있는가 침대 밑을 더듬어 보는 일도 없고 달빛 같은 호기심으로 창문 한 번 넘나들지도 않을 거라던 사람, 날마다 푸른 흙 속에 손을 넣어 싱싱한 씨앗만을 키우겠다던 사람, 여자 없이도 아이를 낳을 거라던 사람,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겠다던 오만하고 거만한 사람, 세상을 잊고 세상에서 잊혀져서 자유롭겠다던 사람, 미친놈이라고 부르던지 돌아버린 놈이라고 부르던지 맘대로 부르라고 당당하던 사람,

 

그 사람 곁에 문득

금지된 사랑의 치맛자락을 살며시 내려놓고 싶어서

나무꾼에게 가기로 되어있는 달빛의 선녀가 하룻밤 새 마음을 돌려

깊고 깊은 빌딩 숲 속에서 비틀거리는 사람

비틀거리며 소리치는 회색 빛 공상과학 영화 속의

안타고니스트, 비몽사몽, 지친 새벽 꿈속으로 환하게, 따스하게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일어나세요.

 

 


 

 

임혜신 시인 / 폭설

 

 

눈 나리는 날 숲으로 가네 늙은 피부 아래 묻힌 핏줄처럼 뜻을 나누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는 들판을 가로질러 빙산처럼 홀로 떠 있는 숲으로 가네 느리게 호흡하는 갈참나무숲 그의 가슴은 아직 따스하고 그의 어깨는 눈 속을 흐르는 바람처럼 자상한 숲으로 가네 새하얀 눈썹을 열고 내려다보는 나뭇가지들 여름내내 신나게 주고 받던 햇빛을 다 떨구어 낸 숲은 드디어 그대와 나만으로 가득하네 한 마리 거대한 새처럼 내려않는 하늘 청렴한 손을 내밀어 내 가슴에 피어나는 눈꽃 덤불을 어루만지고 노루처럼 아늑한 그의 품에서 눈을 감는 나는 이제 막 태어나는 것이라도 좋고 영원히 떠나가는 것이라도 좋으리라 하네

 

 


 

 

임혜신 시인

충북 청주에서 출생. 충북대학교 국어과 졸업.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공대 졸업. 1995년《워싱톤 문학》, 1997년 《미주 한국일보》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현재 미주문인협회 회원, Global Network of Poets〈빈터〉동인이며 《해외문학》편집위원. 미국 플로리다에 거주. 시집으로 『환각의 숲』(한국문연, 2001)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