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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혜신 시인 / 자명종 -새벽 6시 30분-
하루밤 사이, 직장도 그만두고 주식도 팔고 집도 팔고 차도 팔고 아내도 버리고 갑자기 농부가 되고 싶다던 사람, 흙의 몸, 흙의 영혼, 그 더러운 눈과 코와 가슴과 손과 사랑에 빠져서 언젠가는 달아나 버리겠다고 다짐하던 사람, 한 번 달아나면 여차한 경우를 위한 비상의 날개가 잘 있는가 침대 밑을 더듬어 보는 일도 없고 달빛 같은 호기심으로 창문 한 번 넘나들지도 않을 거라던 사람, 날마다 푸른 흙 속에 손을 넣어 싱싱한 씨앗만을 키우겠다던 사람, 여자 없이도 아이를 낳을 거라던 사람,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겠다던 오만하고 거만한 사람, 세상을 잊고 세상에서 잊혀져서 자유롭겠다던 사람, 미친놈이라고 부르던지 돌아버린 놈이라고 부르던지 맘대로 부르라고 당당하던 사람,
그 사람 곁에 문득 금지된 사랑의 치맛자락을 살며시 내려놓고 싶어서 나무꾼에게 가기로 되어있는 달빛의 선녀가 하룻밤 새 마음을 돌려 깊고 깊은 빌딩 숲 속에서 비틀거리는 사람 비틀거리며 소리치는 회색 빛 공상과학 영화 속의 안타고니스트, 비몽사몽, 지친 새벽 꿈속으로 환하게, 따스하게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일어나세요.
임혜신 시인 / 폭설
눈 나리는 날 숲으로 가네 늙은 피부 아래 묻힌 핏줄처럼 뜻을 나누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는 들판을 가로질러 빙산처럼 홀로 떠 있는 숲으로 가네 느리게 호흡하는 갈참나무숲 그의 가슴은 아직 따스하고 그의 어깨는 눈 속을 흐르는 바람처럼 자상한 숲으로 가네 새하얀 눈썹을 열고 내려다보는 나뭇가지들 여름내내 신나게 주고 받던 햇빛을 다 떨구어 낸 숲은 드디어 그대와 나만으로 가득하네 한 마리 거대한 새처럼 내려않는 하늘 청렴한 손을 내밀어 내 가슴에 피어나는 눈꽃 덤불을 어루만지고 노루처럼 아늑한 그의 품에서 눈을 감는 나는 이제 막 태어나는 것이라도 좋고 영원히 떠나가는 것이라도 좋으리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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