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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자영 시인 / 얼굴 없는 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4.

장자영 시인 / 얼굴 없는 책

 

 

검은 책들을 거꾸로 꽂으며

줄곧 동경해왔어 나무의 성난 얼굴

밑줄을 그으면 핏방울 맺히는

실체로서의 활자 말이야

 

색 바랜 책장을 넘기자

구부러진 초침들이 흘러나온다

사진 속의 너는 두 팔이 뒤로 묶인 채

극도로 팽창된 한 얼굴을 핥고 있다

 

부적절한 페이지를 달리는 기억

 

날 선 종이가 나무를 찔러보지만

흔한 고백조차 없고

비명대신 침묵이 쏟아지는

성난 얼굴을 거꾸로 꽂으며

 

검은 책들이 중얼거린다

인생은 얼굴 없는 연애에 불과해, 라고

 

검은 책의 나이테가

듬성듬성 사라져간다

아삭아삭 초침을 씹어 먹는 네게

나무의 몽타주를 묻고 싶지만 대신

사라진 활자 아래

밑줄을 긋는다

 

(2006 시작 신인상)

 

 


 

 

장자영 시인 / 가난한 방

 

 

나의 위로는 초라하고 부적절했다

 

아이들이 신음하며 입가를 닦는다 칠년 전 지금을 경험한 적 있는 일곱살 어리고 일곱 배 작은 난쟁이가 낮은 환호성을 지른다 부끄러운 장갑들이 감춰진다 세상의 모든 예식이 최소되는 무거운 생리통의 밤

 

모든 준비는 과거형이다

소문뿐인 연애를 굳이 끝장낸

밤, 어제

무의미한 굶주림이 잠들자 외롭지 않은 밤이 지상에서 사라진다 끝없이 연기되는 결혼식 그들도 난쟁이를 궁금해하는지 숫자들의 결합 없이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불가능의 밤 누군가 눌려 죽어도 아무 일 없고 일곱 살 어리고 일곱 배 작은 머리통이 긴 레드카펫 위에 떨어져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일요일, 오늘

 

난쟁이의 꿈은 키에 비례한다

 

 


 

 

장자영 시인

197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와 중앙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6년 계간 『시작』을 통해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