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인 시인 / 동박, 동백꽃
동박새가 유두처럼 생긴 꽃봉오리 쪼아대는 대낮 동백 숲에 드니 산도(産道) 열고 순풍순풍 붉은 꽃 피어나는 오랜 수령의 동백나무에서 피, 비린내가 난다
한 달에 한 번씩 꽉 차오르는 아랫배 움켜쥐고 붉은 혈 질펀하게 쏟아내야 가벼웠던 몸 자식 둘을 낳고 이제는 자궁 문이 닫히는 중이다
시도 때도 없이 벌겋게 홍조 띤 얼굴 계절과 상관없이 불같은 적막을 견뎌내며 새벽 맞는 일 허다하다 도대체 틈을 주지 않는다 여자가 빠져나가는 몸에선 버석버석 물기 마른 소리 들린다
동박새 앉았다 간 나뭇가지 낭창낭창 휘어진다 춘정에 못이긴 꽃모가지 우수수 떨어진다 저 흥건하게 젖은 붉은 혈 서럽도록 화사하다
달빛 환하게 내려앉는 밤 나, 거기 동백 숲에 들어 발정 난 동박, 동박새와 한 열흘쯤 몸을 섞다 덜컹, 애라도 밴다면 완강하게 달려드는 갱년기 견딜 만하겠다
이인 시인 / 동박, 동백꽃
모난 몸피를 돌려 깎는다. 상처 난 부위를 살살 도려낸다 한입 크기로 저미려는데 손아귀에서 재빠르게 미끄러진다 빈손에 끈적끈적 달라붙는 감촉이 부드럽다
쌉쌀한 날씨에 저녁거리로 선택한 토란국 이파리에 이슬 고이면 새침하게 털어내는 토란잎 일대기를 생각하다가 엇갈린 인연 골똘하게 떠올린다
확, 달려드는 가려움증 손등을 타고 올라온다 깜박 잊었다 토란 알에는 독성이 있다는 것을 지워지지 않는 독이 고통으로 남는다 저 부드러움을 사랑한 적 있다
한 사내가 가져다준 독한 사랑으로 생의 열꽃 피워낸 적 있다
가끔 불쑥 도지는 부드럽고 달콤했던 사랑 붉은 독성으로 돋아 온몸 가려울 때가 있다
이인 시인 / 집이 운다
늙은 감나무 빈집을 내려다보고 있다
흙담벽 떨어져 나간 토방 앞 들고양이 배 깔고 자울자울 졸고 댓돌 위 다 해진 검정 고무신 한 짝 누워있다
문턱이 다 닳도록 드나들던 안방 방문 위 윗대서부터 내려왔다는 가훈이 비딱하게 걸려있다
여름 한철 국수를 밀던 밀대는 부뚜막을 굴러다니고 녹슨 가마솥에는 거미들이 집을 짓고 있다
빈손으로 허공만 더듬거리던 바람 마당귀, 저 홀로 피어 만삭이 된 봉숭아꽃 씨주머니를 만지작거리고 나비는 문 열린 빈집을 제 집처럼 드나든다
붉은 굴뚝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 그늘 넓히느라 하루가 짧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집 불쑥 대문을 밀고 들어올 것 같은 사람이 그리워 집이 운다
땡감 매달고 있는 감나무 가지 끝 귀 닮은 낮달이 걸려있다
이인 시인 / 장다리꽃
비알밭 속대 겉대 잘려나간 배추꼬랑이가 장다리꽃을 피워 올렸다
겨우내 시린 발로 건너와 노란 물감 울컥울컥 게워내는 모가지가 긴 봄
자식 넷을 키운 어머니 쭈그렁 젖처럼 속대 겉대 다 내어주고 쪼그라든 배추꼬랑이 빈 젖을 물린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배추흰나비 한들거리는 장다리꽃에 앉아 젖을 빤다
오래도록 쪼그리고 앉아 그 꽃을 들여다본다
봄을 밀고 올라온 꽃 대궁에 눈뜬 씨앗들이 모여 있다
이인 시인 / 산벚나무
중동이 꺾인 채 썩어가는 산벚나무 우묵한 몸통에서 자라고 있는 단풍나무 팥배나무를 새끼 보듬듯 품에 안고 햇살을 떠먹이고 있다
제 육신을 거름으로 내주고 있는 저 헌신 산벚나무 밑동에 벌레들이 모여든다
그늘이 접혔다 펴지고 나무 겨드랑이에 오래 감겼던 골바람을 술술 풀어내는 오후의 풍경 속에서
나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목숨을 바친 한 신부의 가난을 떠 올린다
들숨 날숨으로 붐비는 숲속 봄들이 가만가만 걸어 들어간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혜선 시인 / 숲과 강물 사이 외 1편 (0) | 2021.08.04 |
|---|---|
| 윤효 시인 / 배꼽 외 11편 (0) | 2021.08.04 |
| 이태관 시인 / 시간을 돌리다 외 5편 (0) | 2021.08.04 |
| 장자영 시인 / 얼굴 없는 책 외 1편 (0) | 2021.08.04 |
| 임혜신 시인 / 자명종 -새벽 6시 30분- 외 1편 (0) | 2021.08.0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