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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효 시인 / 배꼽 외 1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4.

윤효 시인 / 배꼽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대웅전도 조사당도 요사체도 사라지고 범종각 구리종도 자취 없이 사라지고 돌탑만이 남았다. 쑥대밭 한가운데 비바람이 지어준 가사를 들쳐 업고 돌탑만이 홀로 남았다.

 

 


 

 

윤효 시인 / 가랑잎 설법

 

 

떨어지는 나뭇잎은 모두 땅의 빛깔을 하고 있다. 늘푸른 솔잎도 제 빛깔을 그렇게 바꾼 뒤에야 조용히 내려앉는다.

 

 


 

 

윤효 시인 / 따뜻한 얼음

 

 

혹한이 며칠째 이어지자

둠벙은 몇 차례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한가운데 남겨 놓은

제 숨구멍을

마저 닫아버렸다.

 

송사리 떼가 살고 있었다.

 

 


 

 

윤효 시인 / 고마운 일

 

 

  도로포장공사가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한밤중만 골라 하고 있었다.

  저소음포장이라 하였다.

  고마운 일이었다.

 

  자정 넘어 귀가하다 보게 되었다.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차선보다 먼저 횡단보도를 그리고 있었다.

  더욱 고마운 일이었다.

 

 


 

 

윤효 시인 / 생명선

 

 

날이 풀리자 아파트 마당에 실금이 또 하나 늘었다.?

어제는 비까지 내려 더 아프게 드러났다.?

풀리지 않는 일 탓이겠으나 심란했다.?

손바닥에 자주 눈이 갔다.?

내내 뒤숭숭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 풀 죽을 일이 아니었다.?

실금을 따라 푸른 것들이 일제히 돋아나 있었다.

 

 


 

 

윤효 시인 / 빙어축제

 

 

얼음판 위에 발자국들이 어지러이 찍히고 다투어 구멍이 뚫렸다.

이내 환호가 터졌다.

몇 차례, 또 몇 차례 이어졌다.

그리고는 잠잠해졌다.

더 이상 환호가 터져 나오지 않았다.

먼저 끌려 나온 빙어들이 얼음판을 두들겼던 것이다.

온몸을 내던져 두들겼던 것이다.

 

 


 

 

윤효 시인 / 흙꽃

 

 

일제 강점기에도

이른 봄날 들판에 이는 먼지를 흙꽃이라 부른

시인이 있었다.

 

민둥상 허허벌판 흙강아지로

여태 살았다 해도

우리는

사철 푸르렀으리.

 

 


 

 

윤효 시인 / 사막 2

 

 

분명 여기서부터 사막이라고 했다.

이상했다.

  낯설지가 않았다.

  오히려 낯이 익었다.

  황야에서, 그동안 황량한 줄도 모르고 꾸역꾸역 살아왔던 것이다.

 

 


 

 

윤효 시인 / 사막 4

 

 

터벅터벅 명사산 모래 능선을 오르는 낙타 행렬 저 아래 홀로 꼼지락거리는 이가 있었다.

  낙타 똥을 치우는 이라고 했다.

  가까이 이르러 보니, 뜰채로 낙타의 눈물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

  낙타 등에 올라탄 나의 죗값을 그분께서 치르고 있었다.

 

 


 

 

윤효 시인 / 성(聖) 쓰레기

 

 

자기를 버린 사람들에게

자기를 태워

온기를 되돌려 주고는

높다란 굴뚝을 유유히 빠져나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늘을 향해 뭉게뭉게 날아오르는

하얀 영혼을 본다.

 

어둠이 내리면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로 떠오르는

그 별을 또한 보게 되리라.

 

 


 

 

윤효 시인 / 못

 

 

가슴에 굵은 못을 박고 사는 사람들이

생애가 저물어가도록

그 못을 차마 뽑아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기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을 거기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윤효 시인 / 홍시

 

 

‘감나무 가지 끝에

홍시 하나가

까치밥으로 남아 있었다

서릿바람 불고

눈발 날려도

가지 끝에

빨갛게

남아 있었다

 

밤새 꺼지지 않던

빈자일등.

 

 


 

 

윤효(尹曉) 시인(본명:(昶植))

1956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본명은 창식(昶植). 198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물결』, 『얼음새꽃』, 『햇살방석』, 『참말』과 시선집 『언어경제학서설』이 있음. 편운문학상 우수상, 영랑시문학상 우수상, 2014. 제1회 풀꽃문학상 수상. 전 서울 오산중학교 교장. 현재 <작은詩앗·채송화>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