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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숙 시인 / 고향
강 건너 산 너머 안개 저편 내 마음이 사는 곳
패랭이꽃 들판 가득 피어나고 어둠 속 반딧불이 뛰어 노는 곳 밤을 지새는 푸른 달빛 눈 덮인 산등성 저녁 노을 곱디 고운 곳
자꾸만 뒤돌아보는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곳
정양숙 시인 / 초록빛 쉼터
나그네가 안식하던 초록 쉼터엔 외로운 어둠 쌓이고
사랑의 울타리로 감싸던 빛깔 고운 이름들이여 향기로운 그님들은 허공 속에 흩어진 함박 웃음이요 빛 바랜 사진 속의 진홍빛 기억이라오
무의식 속에 머물다 떠난 행복이라는 이름의 계절은 울창한 숲에 번뜩이던 찬란한 햇살이었네.
정양숙 시인 / 찔레꽃 향기
부드럽고 여린 꽃잎 어디에 이토록 우아한 향취 품었을까 희디 흰 꽃송이마다 애틋한 향내로 피어나는 짙은 그리움
매혹적인 장미도 부럽지 않은 야생의 청아한 얼굴 바람은 말없는데 눈가의 이슬마저 향기를 머금었네
퍼져가는 어둠과 고요 무성한 찔레꽃 넝쿨 너머 향나무 검은 그늘 듣고 있어도 전설같은 소쩍새 울음소리 가슴 베이네 애수의 빛깔로 번뜩이는 빛 잃은 시간들이여
눈 길 뗄 수 없는 아름다움 새털구름처럼 흩어져버리면 또다시 오월을 기다리고 유월을 기다린다
정양숙 시인 / 빨간 고구마 노란 고구마
유명 고구마 산지인 내 고향 초등학생 계집애가 십리 길을 터덜터덜 걸어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엄마와 찐 고구마만 있으면 되었다
가을이면 아버지가 컴컴한 윗방에 빨간 고구마 노란 고구마를 섞어 만든 산더미 같은 고구마 노적가리 그 많은 고구마는 가마솥 청솔가지 위에서 파삭하게 쪄지거나 눈 내리는 겨울 밤 질화로 속에서 느릿한 자장가처럼 고소한 군고구마 냄새를 풍겼다 무조건 좋은 엄마가 곁에 있고 밥보다 더 맛있는 고구마가 풍성했던 꽃 많고 눈 많은 농촌의 어린 시절 자연을 친구 삼은 시골아이의 행복은 봄 들녘 뻐꾸기 소리처럼 간단했다.
정양숙 시인 / 두 번째 풍경
뒤늦은 타향살이가 적막강산처럼 느껴지는 날 햇빛 고운 거리를 따라 걷는다 누군가 성의 없이 길가에 심은 어린 비파나무에 풀밭에 버려진 나뭇가지를 주워 작은 나무 지지대를 만들어주기도 하면서 도심 속 공원마을에 다다른다
그곳에 가면 고향과 타향의 경계가 애매해진다 여기저기 분수 물소리가 시냇물 소리를 이루고 도시 까마귀가 떼지어 날고 다람쥐가 뛰논다 동네 초입 놀이터의 소소한 소음을 제외하면 사방으로 곧게 뻗은 가로수 길이 조용한 산골처럼 한가롭다
멋스러운 초목들의 건강한 품 속에서 복잡한 감정을 조율하고 거칠어진 마음이 윤택해진다 삶의 긴장에서 일정 거리를 벗어나는 시간은 잊어본 적 없는, 한 번도 이별한 적 없는 소나무 동산 양달말 생가에 돌아온 기분이다.
정양숙 시인 / 야생의 지구
놀라운 야생의 지구 절대 개발 금지 지역 강가나 풀숲에 덩치 큰 들짐승들이 여유롭게 거니는 거대한 화산지대 유황으로 누렇게 변색된 대형바위 화산구에서 뿜어 나온 유황연기가 넓고 길다랗게 바람결에 퍼져간다 또 다른 곳에선 암반 밑의 펄펄 끓는 수증기를 규칙적인 간격으로 하늘 높이 분출시킨다
숲 속이나 호숫가나 아름다운 코발트블루 웅덩이나 진흙웅덩이나 팥죽처럼 펄떡대는 웅덩이나 노랑 청동 쪽빛 흰빛 어우러진 추상화 웅덩이나 끓어 넘치는 용암들이 유황 냄새 나는 수증기를 끊임없이 피워 올린다 연기처럼 하얀 김이 이리저리 날리며 병든 짐승을 치유시키고 아픈 사람을 치료한다 살아있는 유황 안개가 끝없이 번져 여행객의 노독을 몰아낸다.
정양숙 시인 / 시온 산
보고 또 보아도 경이롭고 수려한 시온 산 태곳적 신비의 감동 앞에서면 문득 할 말을 잊는다 무슨 말로 어떤 시와 노래로 감히 표현하랴 창조자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 웅장하고 기기묘묘한 사암 병풍 계곡을 천천히 돌아나갈 때 때맞춰 울려 퍼지는 천상의 노래 카치니의 아베마리아 신의 솜씨는 이토록 위대하고 예술은 보석처럼 아름다워라 겸허하고 간절한 기원 감동스런 찬미의 노래가 하얀 구름 위를 걷게 한다 ‘천국이다!’ 웅대한 신의 정원에 빛나는 저 맑고 부드러운 오후의 햇살처럼 오염되지 않은 원시의 향취에 압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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