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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환 시인 / 바퀴를 위하여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4.

이환 시인 / 바퀴를 위하여

 

 

검은 아스팔트 위를 광속으로 달려가는 바퀴들 일생을 달리기 위해 태어난 슬픈 족속, 죽지 않기 위해 악을 쓰고 굴러간다 세상의 존재들은 모두 제 몫의 무게를 굴리다 간다 도로에서 숲속에서 바다에서 좁은 골방에서 광장에서 검은 땅속에서

 

구른다는 것은 바닥에 투항하는 일 끝없이 육체를 소모해 절망에 바치는 일 닳아 없어지는 일

 

나는 바퀴다 내 바퀴 위에는 누가 타고 있나 누가 나를 굴리고 있나 나는 앞만 보고 달려가는 맹목적인 바퀴 구르는 것만 알아서 굴려주는 대로 굴러가는 줏대 없는 바퀴 가자 바퀴야 가자 바퀴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바퀴 꿈속에서도 하늘에서도 날아다니는 바퀴

 

나는 바퀴를 굴리는 바퀴 바퀴를 벗어날 수 없는 마침내 바퀴에 밀려 세상 밖으로 쫓겨나는 바퀴 풀밭 위의 바퀴

 

-이환 시집 <세상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갖기 시작했다>

 

 


 

 

이환 시인 / 유리관 속에 갇힌 밀림

 

 

기가 꺾인 채

둥그렇게 똬리 틀고 널브러진 코브라

겸허한 자세로 몸 낮췄다

유리관 방패 삼아 태평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한번 물면 1분 안에 사망하고 만다

는 글귀에 시선 닿자

몸을 움찔 다시 그를 살핀다

그래 봤자 그림의 정물인 걸

콧방귀 뀌며 두려움 내려놓는다

그는 이제

 

교양 있고 세련된 문명의 족속

함부로 날뛰지 않는다

정글 헤매지 않아도 어김없이 배를 채워주는 호사

혀는 이미 독성 잃어 천적 위협할 일 없고

길고 육중한 몸뚱이는 관람객들 호기심으로 족하다

원시의 숲 질주하던 날들은

아득한 옛날얘기

허나 어쩌랴

 

꿈틀거리는 몸

유리관 너머로 달려가는 시선은

한 번 노려보면 바르르 떠는 푸른 나뭇가지 밀림 주름잡던 당당한 포부는

저기 보이는 검은 숲은 실제 아닌 환상 이게 아닌데

공연히 심심한 관람객들 향해 휙휙 몸 흔들어보고 혀를 날름대기도 하고

사나운 맹수들 떠올리며 빈 허공으로

왕년의 기억 꼿꼿이 치켜들어 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막아서는 투명한 벽,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불모의 땅

이 낯선 삶의 기한은 언제까지인가

 

아, 졸려

밀림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고 있다

 

-이환 시집 <세상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갖기 시작했다>

 

 


 

 

이환 시인 / 세렝게티가 걸려 있는 동물원

 

 

‘더 파크 동물원’엔 반 평의 탄자니아가 있어요

국경은 발 하나로 쉽게 넘나들죠

그곳에선 모가지를 치켜들 일

마른 나뭇가지 하나 달랑 누가 걸어놓았는지

휑하니 걸려 있는 공갈 젖꼭지

 

목이 긴 저 짐승은 생각을 굽히지 않아요

모가지 전체가 온통 고집인 걸요

높은 곳에 지어놓은 아득한 성

날렵한 혀 좀 봐요

씹을수록 쌉싸름한 아프리카가

더운 바람 숨차게 몰려온다는데요

높은 울타리는 내려앉고 광활한 평원이 막 달려간다는데요

한가한 소떼와 느린 마사이 사람들 몰고 다니는

구름 목장이 펼쳐진다는데요

 

깔깔대는 관람객들 웃음 따위

상관있나요

고공 크레인의 1인 시위처럼

허공을 결사적으로 풀무질하는데요

침이 흘러내리고

피가 흘러내리고

어둠이 흘러내려도

 

그곳의 기린들은 지치지도 않아요

밤새도록 마법의 젖꼭지를 빨면

세렝게티 넓은 초원이 달려온다는데요

외로운 허기를 몰고 간다는데요

 

-이환 시집 <세상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갖기 시작했다>

 

 


 

 

이환 시인 / 핑퐁 게임

 

 

공은 함부로 날뛰는 짐승 같아서

성질 머리를 살살 달래주어야 한다

저돌적으로 날아온 공을 되받아 후려친다면

빗나가기 십상, 이럴 땐

포물선을 그리듯 부드럽게 넘겨줘야 한다

 

아무 때나 라켓을 휘두르는 건 하수나 하는 일,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서 슬쩍 커트만 찔러줘도 된다

있는 힘껏 스매시를 날리거나

과감한 드라이브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도 때론 필요하다

고수의 테크닉이란 그런 것,

 

공을 갖고 놀 줄 알아야 한다

변화와 코스를 생각하며

포핸드와 백핸드로 요리할 줄 알아야 한다

공은 나의 허점을 집요하게 공략한다

비틀거리는 순간 금방 알아차린다

항상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한다

 

승패를 가리는 게임의 세계에서

막판엔 누구나 한 방에 주저앉는다

한방에 메달을 거머쥐는 자가 있고

한방에 낙향하는 자가 있다

뼈아픈 실책이 평생을 발목잡기도 한다

공이 날아온다

 

어떤 공은

너무 난폭하고 절망적이어서

라켓을 삼켜버린다

공은 라켓을 배려하지 않는다

 

-2019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월호

 

 


 

 

이환 시인 / 각을 세우다

 

 

분리수거를 위해 박스를 정리한다

뾰족한 각은 납작하게 펴줘야 한다

손으로 안 되면 발로 뭉개서 묵은 기억을 지워야 한다

박스는 오랜 습관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나는 각으로 존재한다

무수한 각이 생겨나고 사라지면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러니까 나를 키워온 것은 각이다

편협한 예각이 나의 주된 무기였으므로

경계와 의심의 날로 상대를 공격하며 나를 방어해 왔다

나는 둔각의 여유를 갖고 싶었을 것이다

 

태어날 때 나는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순진무구한 평각이었을 텐데

살기 위해 각을 좁혀왔다

 

신의 이름으로

관습과 편견으로

 

각은 단단한 뼈대를 짓는 일이라서 직립의 사명으로 오롯하다

 

각이 각을 만나 곽을 지어 살고 관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한 생이다

각은 부딪치면서 더 날카로워지거나 둥글어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각을 세우고 허물면서 수없이 나는 태어나고 죽는다

내 안에 남은 각이 나를 자꾸 찌른다

마침내 각은 다 버려야 한다

 

-2020년 <작가와 사회> 여름호

 

 


 

 

이환 시인

2011년 《우리詩》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세상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갖기 시작했다』가 있음. 현재 〈영남시〉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