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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음 시인 / 섬
그날, 나는 나를 물 속에 던졌다
순간 내 안에 있던 사람들도 깨끗이 수장水葬되었다
내가 찾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날 찾지 못하도록 깊이 잠수하였다
그대에게 빨려든 아득한 잠수
바닥에 닿아보니 나를 피해 먼저 잠수해 버린 얼굴들이 보였다
칩 속에 꼭꼭 숨은 그대를 찾아 하염없이 발신음을 울렸다
그날, 나는 깜깜한 물속을 돌아 나오며 뻘투성이가 된 채 다시는 내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고음 시인 / 달팽이에게서 읽다
밭에서 막 따 온 상추 속에 달팽이 한 마리가 앉아 있다
파란 잎에 송송송 바늘구멍을 낸 채 저도 하나의 잎맥인양 웅크리고 앉아 있다
만지면 부서질 듯 투명한 껍질에 싸인 생긴 모습 그대로가 제 이름인 달팽이가 문득 나를 돌아보게 한다
쉬는 듯 움직이고 멈춘 듯 운동하는 달팽이 저렇게 느리게 느리게 평생을 사랑했을 것이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님을 말없이 스친 바람의 손짓 하나도 그냥이 아님을 몸으로 보여주는 달팽이
상추밭 속에서 달팽이가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며 나는 다시 상추밭으로 되돌아갔다.
나고음 시인 / 레드와 블랙
악마의 혓바닥같이 날름거리는 불꽃, 레드 숨겨진 색을 파헤치며 훨훨 날던 불새 한순간 주춤 출렁임이 남긴 흔적, 블랙
불길과 바람의 마찰,
가마의 온도를 높이고 잘 익기를 바랄 때 아픔은 예감되었고 상처는 예견되었다 쩡 쩡 고통을 받아들이는 신음소리 몸을 뒤집는 소리 비밀은 끝내 짙은 문신으로 남기고……
잘 익었네!
예측할 수 없는 그대와 나의 운명 같은 레드와 블랙 불과 바람의 요변窯變으로 더욱 깊어진 색
삶이란 레드와 블랙 그리고 상처
나고음 시인 / 크라운 샤이니스*Crown Shyness
느릅나무 아래 누워서 하늘을 찌르는 나무의 꼭대기를 본다 하늘은 나무 끝에 매달린 파란 열매
겹치지도 부대끼지도 않는 자리에서 저만치서 오는 바람과 살랑살랑 주고받는 말 경이롭기만 한 나무들의 사적 공간 그들이 누리는 자유가 눈부시다
햇빛도 바람도 독점하지 않고 몸을 살짝 비켜주는 나무들의 수줍음, 크라운 샤이니스
나무는 알고 있다 한결같이 넉넉한 것에 대한 그들만의 겸손한 응답을.
나무는 모른다 그들의 작은 두근거림이 나무 아래 있는 이에게 주는 큰 위안을
*크라운 샤이니스 : 1920년대 이후 논의되고 있는 이론. 나무들이 햇빛을 골고루 받고 가지들이 부딪혀 손상되지 않기 위한 자연현상이나 정확한 원인은 모름.
나고음 시인 / 파랑의 유혹, 컬러링북
설레임이란 색깔로 애벌 채색을 한다 아직 닿지 않은 세상
굵고 가는 정맥처럼 흑백의 선으로 남아 있는 낯선 풍경 그 안에 하얗게 빈 공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아마을*엔 꿈결 같은 파랑만 있으면 된다 해가 강물에 몸을 씻고 바닷가의 나무를 끌고 가면 마을이 파랑 수액으로 몸을 적시고 파랑 파랑 바람의 소리에 귀를 연다
내 안에 꿈틀거리던 무겁고 담담한 무채색이 컬러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파랑을 통해 하양도 분홍도 눈을 뜨는 희미한 꿈을 선명하게 채색해 주는 컬러의 유혹
지나온 색으로 걸어갈 색을 찾아가는 컬러링북에 마음을 채색한다
*이아마을 : 산토리니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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