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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 시인 / 떠도는 고향
내가 나를 여러 번 부인해도 이제 나는 이 나라의 많고 많은 도시의 붙박이 시민 세밑 남들처럼 짬을 내어 도착한 남해바다 소록도 건너가는 녹동항 발가락 손가락 잘린 그날 그들의 이주는 몰라도 바다는 깊고 물살은 빨라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칠순을 넘긴 여인의 생선가게에 들려 생선을 흥정한다 젊은이의 목소리가 동백이파리 같다는 덕담에 여기가 고향이냐고 나는 묻고 1시간 30분 거리 순천 근교에서 출퇴근을 한다 하며 고향이 어디냐 되물어 온다 내 오래 뼈가 굳은 도회를 말하려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가난만 낮은 봉분으로 남겨준 저 내륙 무진장을 얘기한다 여인은 주름살을 부챗살처럼 펼치며 젊은 시절 많은 아이들을 기르느라 생선 다라이를 이고 그곳에도 갔었노라고 사람들이 다 바다처럼 속과 겉이 똑같이 맑더라고 먼 이방의 장사치에게 밥도 잠자리도 듬뿍듬뿍 마련해줬다는 가난처럼 더딘 새벽에는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며 이불 밑으로 손바닥을 밀어넣고 잠자리는 어떠했느냐고 물어오는 안주인의 말씨 또한 따뜻하여 같은 나라 하늘에 뜬 별들인데도 그곳 별들은 너무나 크고 높아 별들이 주먹만 했다는 그 말에 문득 나의 어린 내륙이 몇 시절 먼지를 털고 일어나 걸어오는 것이어서 다음에 오면 꼭 들리겠노라고 날도 저물었는데 내 차로 같이 가자하자 가게 앞 2.5톤 트럭을 가리키며 지금은 고무다라이 대신 트럭에 물건을 싣고 이 고을 저 고을 생선가게에 어물을 대주기도 한다는 이 칠순 노구의 이야기 속에서 나의 내륙 그곳에 그렇게 많던 눈발이 이 남녘 항구에 무진장 철없이 내리고 있었다
문정 시인 / 물고기자리
물매 매끈한 골짜기들을 거느리고 엎드려 있는 산맥들을 바라볼 때마다
하늘에는 이 지상으로 물을 흘려 내리던 호수들이 있었음을 알겠다
바람이 산맥들을 헤집고 지나갈 때마다
모천으로 헤엄쳐 가던, 수많은 연어나 송어 같은 물고기들이 거슬러 오르다가 뛰어 오르다가 떨어뜨린 비늘들이 파닥거린다
저 깊고 짙푸른 하늘에는 옛날 옛적 강을 거슬러 올라간 물고기들이 신화도 말라버린 달력 속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고, 눈물마저 바닥난 눈동자들을 소금처럼 반짝거리며 살고 있다
아직도 모든 산맥에서는 강물냄새가 난다
문정 시인 / 자루 이야기
빙판길에 넘어진 노모가 속살을 몽땅 쏟아냈다 쪼그라진 자루처럼 방바닥에 누워 있다 나는 그녀가 입가의 주름처럼 흘려내는 길을 벗어나지 못한다 꼬불꼬불한 논둑길을 걸어가 개구리알을 떼어 먹인다 그녀를 햇살 속으로 조금 더 밀어 넣고 개구리알들이 그녀의 내장 속에서 껍질을 톡톡, 입이 아주 쪼그마한 올챙이들이 뼛속으로 꼬물꼬물, 그녀의 골수를 조금씩 파먹고 제 꼬리와 아가미를 잘라낸다 그녀가 오물거리는 입으로 개구리 울음을 쏟아낸다 홀쭉한 울음이 검정 비닐봉지처럼 태양 속에 숯덩이로 박히고 화장장 화구 바깥에도 햇살처럼 울음이 와글와글하다 나는 허공에 젖은 두 눈을 박아놓고 개구리처럼 입을 쫙 벌려 들판의 햇빛들을 날름날름 받아먹는다 통통한 어둠이 한 자루다
천년의 시작 2008년 여름호
문정 시인 / 옥탑방 여자
옥탑방 여자가 눈 덮인 골목을 몇 점 오려 널고 있었네 사내는 휠체어에 앉아 2층 옥상을 내려다보았네 그 여자의 빨래건조대를 아파트 3층 발코니로 바짝 끌어 당겼네 교회당 종소리가 얼음처럼 단단한 사내의 바깥공기를 말랑말랑하게 두드려주었네 빨래에는 그 여자의 지난 일주일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네 사내는 여자의 발끝으로 꼭 길 하나 흘려놓고 싶어 가만가만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네 좀처럼 꿈쩍하지 않는 발바닥에 바퀴나 깃털을 달고 싶었네 빨래들이 햇살을 물고 금방 피라미 떼처럼 꿈틀거렸네 젖은 수건 한 장이 손을 뻗어 여자의 어깨를 어루만졌네 그 여자의 발끝에서 시가지 쪽으로 하얀 길이 달려나갔네 사내의 지루한 세상은 너무 아름다워 멀리 있었네 여자의 눈에 쉽게 끌려온 시가지가 여자의 입술에 웃음을 새겨 넣었네 갑자기 빨래 한 장이 긴 줄에서 여자 앞으로 뛰어내렸네 잽싸게 빨래를 집어 들고 뒷덜미에 집게를 물리는 여자의 가슴이 높은음자리표처럼 출렁거렸네 사내는 목을 빨래처럼 길게 쭉 내밀었네 순간 2층 옥상과 3층 발코니 사이에 길이 척 놓였네 사내는 휠체어를 힘껏 앞으로 굴려나갔네 그 여자가 옥탑방 문을 쿵 닫고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네 빨래들만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고 햇살이 사내를 자꾸만 간질였네 눈이 녹아내리는 골목길 위로 두 개의 바퀴자국을 내며 사내는 굴러가고 있었네
천년의 시작 200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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