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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애숙 시인 / 북극성
오래된 삼나무 그림자가 덜컹, 흔들립니다
세상을 다 밟고 간 이름을 부르며 삼나무 가지를 밟아오릅니다 삼나무 그림자가 삼나무 꼭대기를 만들며 자라는 동안 없는 이름은 더 먼 곳으로 없는 이름을 끌고 떠났는지 나는 어둑한 쪽으로 패인 발자국을 던집니다
세상의 낡은 문고리들이 덜그럭거리고 뒤태를 잃은 사람들이 저물도록 숲을 물들일 때
홀로,
길 잃은 것들을 끌어안는 당신 떨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당신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영원을 새기는 당신
당신을 잃고 난 뒤에야 가믈한 북극이 보였습니다
권애숙 시인 / 보름
이쯤에선 퉁퉁 붓지 않은 것이 없다. 머리카락도 한 뼘은 더 자라났는데 허기마저 탱탱한 길 위에서 다시 허둥거린다. 마지막 각을 뭉갠 사방이 천천히 열린다. 발밑이 환하다는 건 뒤돌아보지 말라는 유혹이다. 절정은 어딘가로도 계단을 놓을 수 있는 때. 너무 둥글어져 아무것도 껴안지 못한다는 당신을 향해 이젠 편안히 쭈그러들 일만 남았다. 구겨 넣었던 모서리 몇 끄집어내 선물을 쌀 보자기처럼 바닥을 펼칠 일만 남았다.
권애숙 시인 / 블랙박스
여자 없는 여자밭에 감자꽃 피었다 유언인 듯 묻어둔 감자에 코가 생기고 눈이 생겼다 비탈진 고랑마다 으스름 여자꽃 터졌다
꽃을 따내야 감자가 실하지 깨달음은 우째 늘 뒤통수를 치는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꽃숭어리 꺾어 던지고 여자의 감자밭을 뒤집는다
찌그러진 밥통 같은, 퉁퉁 부은 손등 같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멍이 번진 뒤꿈치, 뜯기고 갉아 먹힌,
이게 니가? 너 맞나?
열개도 넘는 모가지 줄줄이 매달고 여자야 이 많은 너를 깊이도 묻어두고 때 묻은 법으로만 웃어제꼈더나
권애숙 시인 / 달려라 누!
피 묻은 태반을 덮어쓰고 땅바닥에 뚝 떨어진 누는 젖은 네 다리를 겨우 일으켜 벌벌벌벌 걷는다 금방 화면 밖으로 내달린다
그래야만 한다, 어떤 역사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 건 흘러간 유행가다
붉은 눈알을 굴리는 치타와 멀리서 어둑해지기를 기다리는 하이에나 사방의 허기진 입들이 어린 누를 빠르게 키운다
먹는 일도 죽는 일도 달리고 달리는 일 푸른 초원의 푸른 풀들은 어디에 있는가
권애숙 시인 / 꽃관
네가 보내준 히아신스가 한쪽으로 쓰러지는 중이다 숭어리숭어리 무겁게 기대오는 불덩어리에 마음을 데이던 내 얼떨결도 한쪽으로 쓰러지는 중이다
꼬박 앓는 밤의 바다를 건너 왔는가 한 방향으로 무너지는 것들에선 뜨거운 물불의 냄새가 난다 구겨 넣었던 속꽃들 마지막 잔물결을 꺼내 흔들며 속속들이 뒤집어지는 우리 녹빛 꽃바다
어느 날에는 창 너머로 묵은 별들이 쏟아지고 녹슨 꽃자루 바닥을 쓸 때 축 처진 어깨가 사랑의 각도였다고 더디게 서로를 고이며 고마웠다, 고백 할까
너무 무거운 건 이름조차 부르기 힘이 들어 속도도 경계도 빠르게 지우는 계절의 전편, 죽도록 찬란했던 사랑의 꽃관들이 열렬하게 뚜껑을 닫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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