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권애숙 시인 / 북극성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5.

권애숙 시인 / 북극성

 

 

오래된 삼나무 그림자가 덜컹, 흔들립니다

 

세상을 다 밟고 간 이름을 부르며

삼나무 가지를 밟아오릅니다

삼나무 그림자가 삼나무 꼭대기를 만들며 자라는 동안

없는 이름은 더 먼 곳으로 없는 이름을 끌고 떠났는지

나는 어둑한 쪽으로 패인 발자국을 던집니다

 

세상의 낡은 문고리들이 덜그럭거리고

뒤태를 잃은 사람들이 저물도록 숲을 물들일 때

 

홀로,

 

길 잃은 것들을 끌어안는 당신

떨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당신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영원을 새기는 당신

 

당신을 잃고 난 뒤에야 가믈한 북극이 보였습니다

 

 


 

 

권애숙 시인 / 보름

 

 

이쯤에선 퉁퉁 붓지 않은 것이 없다. 머리카락도 한 뼘은 더 자라났는데 허기마저 탱탱한 길 위에서 다시 허둥거린다. 마지막 각을 뭉갠 사방이 천천히 열린다. 발밑이 환하다는 건 뒤돌아보지 말라는 유혹이다. 절정은 어딘가로도 계단을 놓을 수 있는 때. 너무 둥글어져 아무것도 껴안지 못한다는 당신을 향해 이젠 편안히 쭈그러들 일만 남았다. 구겨 넣었던 모서리 몇 끄집어내 선물을 쌀 보자기처럼 바닥을 펼칠 일만 남았다.

 

 


 

 

권애숙 시인 / 블랙박스

 

 

여자 없는 여자밭에 감자꽃 피었다

유언인 듯 묻어둔

감자에 코가 생기고 눈이 생겼다

비탈진 고랑마다 으스름 여자꽃 터졌다

 

꽃을 따내야 감자가 실하지

깨달음은 우째 늘 뒤통수를 치는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꽃숭어리 꺾어 던지고

여자의 감자밭을 뒤집는다

 

찌그러진 밥통 같은,

퉁퉁 부은 손등 같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멍이 번진 뒤꿈치, 뜯기고 갉아 먹힌,

 

이게 니가? 너 맞나?

 

열개도 넘는 모가지 줄줄이 매달고 여자야

이 많은 너를 깊이도 묻어두고

때 묻은 법으로만 웃어제꼈더나

 

 


 

 

권애숙 시인 / 달려라 누!

 

 

피 묻은 태반을 덮어쓰고 땅바닥에 뚝 떨어진

누는 젖은 네 다리를 겨우 일으켜

벌벌벌벌 걷는다

금방 화면 밖으로 내달린다

 

그래야만 한다, 어떤 역사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 건

흘러간 유행가다

 

붉은 눈알을 굴리는 치타와

멀리서 어둑해지기를 기다리는 하이에나

사방의 허기진 입들이 어린 누를 빠르게 키운다

 

먹는 일도 죽는 일도 달리고 달리는 일

푸른 초원의 푸른 풀들은 어디에 있는가

 

 


 

 

권애숙 시인 / 꽃관

 

 

네가 보내준 히아신스가 한쪽으로 쓰러지는 중이다 숭어리숭어리 무겁게 기대오는 불덩어리에 마음을 데이던 내 얼떨결도 한쪽으로 쓰러지는 중이다

 

꼬박 앓는 밤의 바다를 건너 왔는가 한 방향으로 무너지는 것들에선 뜨거운 물불의 냄새가 난다 구겨 넣었던 속꽃들 마지막 잔물결을 꺼내 흔들며 속속들이 뒤집어지는 우리 녹빛 꽃바다

 

어느 날에는 창 너머로 묵은 별들이 쏟아지고 녹슨 꽃자루 바닥을 쓸 때 축 처진 어깨가 사랑의 각도였다고 더디게 서로를 고이며 고마웠다, 고백 할까

 

너무 무거운 건 이름조차 부르기 힘이 들어 속도도 경계도 빠르게 지우는 계절의 전편, 죽도록 찬란했던 사랑의 꽃관들이 열렬하게 뚜껑을 닫는 중이다

 

 


 

권애숙 시인

경북 선산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95년  《현대시》 시 등단. 시집으로 『차가운 등뼈 하나로』『카툰세상』『맞장 뜨는 오후』『흔적극장』등이 있음. 부산시인협회, 부산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