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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세정 시인 / 빵만으로도 살 수 있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5.

문세정 시인 / 빵만으로도 살 수 있다

 

 

정오의 갯벌이 태양오븐에 구워지고 있어요

호밀반죽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진흙구릉 표면마다 기포를 일으키며

속까지 노릇노릇 익어 가는데, 저런

눈치 빠른 방게들 벌써 냄새를 맡았나

한 놈 두 놈 어느새 친구의 친구까지

귀엣말을 나누며 꾸역꾸역 몰려드네요

 

몇날 며칠 숨 안 쉬고 먹는다 해도

도무지 채워질 것 같지 않던 허기였건만

오랜 그리움 앞에서 덜컥 말문이 막히듯

빵 냄새 진동하는 마을,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야 하나

어딜 파고들어야 이 지독한 허기를 채울 수 있을까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가자 미리 점찍어 둔

구멍으로 붉은 집게발들이 속속 들어가네요

각자 점찍어 둔 빵집으로 부리나케 들어가

말랑말랑한 머드빵의 속살을 뜯어먹다

웅크린 채로 등을 눕히는

 

햇볕에 잘 구워진

포구갯벌은 그리움이 깊어져

갑각류가 된 것들의 밥이자 집이랍니다

 

 


 

 

문세정 시인 / 상자 이미지

 

 

각각 크기가 다른

알록달록한 종이상자에 시간을 정리해 둔다

 

잘 익은 앵둣빛 상자를 열면

스무 살적 그와 함께 훔쳐 두었던

붉은 태양이 아직도 생생하게 꿈틀거리고

얼굴이 투명하게 비치는 코발트색 상자엔

내가 건너다 만 바다가 출렁출렁 담겨 있다

바다와 함께 줄줄이 딸려 온 자갈과 모래알들

그 중 거반은 시간 물살에 쓸려가 버렸고

더러는 바닥으로 가라앉아 별이 되기를 꿈꾼다

 

밤이 되면 내 방은 오케스트라 무대가 된다

어느덧 각양각색의 상자에서 새어나온

파도소리 바람소리가 백 뮤직으로 깔리고

어둠이 깊어질수록 초침박자에 맞춰

모래알과 조개껍질이 내는 경쾌한 마라카스

 

담아두고 싶은 것이 많은 만큼 상자는 늘어나고

점점 내 방은 좁아진다 문득 한밤중에 일어나보면

상자 틈에 간신히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뒤척이며 돌아눕는 순간 빈 상자가 입을 벌린 채

나를 향해 사납게 달려들기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상자는 늘 부족하고

 

차곡차곡 쌓여가는 상자들

그 틈에 끼어 나도 별이 되길 꿈꾼다

 

2005년 제6회 <시인세계> 신인작품 공모 당선작

 

 


 

 

문세정 시인 / 시인의 마을

 

 

고층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서 꽃무늬차렵이불이 비를 맞고 있다 우산도 없이 프리다 칼로 공원에 앉아 있던 블라우스처럼 고스란히 젖는다 흥건해진다 속으로 구름을 키우며 사는 것들은 원래 빗물에 약한 법

 

이불 속 드라이플라워되었던 꽃잎들 선명하게 몸 불린다 난간에 매달린 줄기가 불안하지만 보송보송하게 굴어야 할 내일을 위해 지금은 흡수 맘껏 흡수

 

기공을 활짝 열고 자리 편 이상 이미 난 젖은 솜, 양팔저울에 슬픔의 무게를 달아볼까, 그동안 사랑인 줄 알고 키워 온 구름이 너무 무거워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다 더욱 거세지는 빗줄기

 

-시집 <예수를 리메이크하다>(문학세계사)에서

 

 


 

문세정 시인

인천에서 출생. 경기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5년 《시인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예수를 리메이크하다』(문학세계사, 2008)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