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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정 시인 / 빵만으로도 살 수 있다
정오의 갯벌이 태양오븐에 구워지고 있어요 호밀반죽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진흙구릉 표면마다 기포를 일으키며 속까지 노릇노릇 익어 가는데, 저런 눈치 빠른 방게들 벌써 냄새를 맡았나 한 놈 두 놈 어느새 친구의 친구까지 귀엣말을 나누며 꾸역꾸역 몰려드네요
몇날 며칠 숨 안 쉬고 먹는다 해도 도무지 채워질 것 같지 않던 허기였건만 오랜 그리움 앞에서 덜컥 말문이 막히듯 빵 냄새 진동하는 마을,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야 하나 어딜 파고들어야 이 지독한 허기를 채울 수 있을까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가자 미리 점찍어 둔 구멍으로 붉은 집게발들이 속속 들어가네요 각자 점찍어 둔 빵집으로 부리나케 들어가 말랑말랑한 머드빵의 속살을 뜯어먹다 웅크린 채로 등을 눕히는
햇볕에 잘 구워진 포구갯벌은 그리움이 깊어져 갑각류가 된 것들의 밥이자 집이랍니다
문세정 시인 / 상자 이미지
각각 크기가 다른 알록달록한 종이상자에 시간을 정리해 둔다
잘 익은 앵둣빛 상자를 열면 스무 살적 그와 함께 훔쳐 두었던 붉은 태양이 아직도 생생하게 꿈틀거리고 얼굴이 투명하게 비치는 코발트색 상자엔 내가 건너다 만 바다가 출렁출렁 담겨 있다 바다와 함께 줄줄이 딸려 온 자갈과 모래알들 그 중 거반은 시간 물살에 쓸려가 버렸고 더러는 바닥으로 가라앉아 별이 되기를 꿈꾼다
밤이 되면 내 방은 오케스트라 무대가 된다 어느덧 각양각색의 상자에서 새어나온 파도소리 바람소리가 백 뮤직으로 깔리고 어둠이 깊어질수록 초침박자에 맞춰 모래알과 조개껍질이 내는 경쾌한 마라카스
담아두고 싶은 것이 많은 만큼 상자는 늘어나고 점점 내 방은 좁아진다 문득 한밤중에 일어나보면 상자 틈에 간신히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뒤척이며 돌아눕는 순간 빈 상자가 입을 벌린 채 나를 향해 사납게 달려들기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상자는 늘 부족하고
차곡차곡 쌓여가는 상자들 그 틈에 끼어 나도 별이 되길 꿈꾼다
2005년 제6회 <시인세계> 신인작품 공모 당선작
문세정 시인 / 시인의 마을
고층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서 꽃무늬차렵이불이 비를 맞고 있다 우산도 없이 프리다 칼로 공원에 앉아 있던 블라우스처럼 고스란히 젖는다 흥건해진다 속으로 구름을 키우며 사는 것들은 원래 빗물에 약한 법
이불 속 드라이플라워되었던 꽃잎들 선명하게 몸 불린다 난간에 매달린 줄기가 불안하지만 보송보송하게 굴어야 할 내일을 위해 지금은 흡수 맘껏 흡수
기공을 활짝 열고 자리 편 이상 이미 난 젖은 솜, 양팔저울에 슬픔의 무게를 달아볼까, 그동안 사랑인 줄 알고 키워 온 구름이 너무 무거워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다 더욱 거세지는 빗줄기
-시집 <예수를 리메이크하다>(문학세계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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