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정주 시인 / 심우도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5.

이정주 시인 / 심우도

 

 

절간에 나타난 나를 말없이 쳐다보시던 어머니, 혼자, 어린 형은 절간 마당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모았다. 그러나 두 손은 만나지지 않았다. 분향 냄새가 내 코를 꿰었다. 목탁소리가 내 귓불을 거칠게 두드렸다. 오층탑 아래는 먹음직한 풀밭, 나는 고개를 숙이려 했다. 그러나 내 등뼈는 굳어 있었다. 천수경이 내 뺨을 때렸다. 콧물인 듯 코피인 듯 내 코 끝을 간질던 물기, 나는 눈을 감은 채 대웅전을 뚫고 지나갔다. 대웅전 뒤켠 돌밭으로 나는 자꾸 쓰러지며 올라갔다. 형이 나를 따라왔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목에서 풍경소리가 났다. 나는 돌밭을 벗어나 숲길을 걸어갔다. 형은 내 등에 올라탔다. 저어기 산 아래 절간 마당에서 묵주를 돌리고 계신 어머니, 혼자, 나는 어린 형을 등에 태우고 산등성을 넘고 있었다.

 

 


 

 

이정주 시인 / 퇴근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돌멩이 하나가 날아왔다

내 이마가 터졌다

돌멩이는 어느 별에서 날아온 것 같앗다

돌멩이가 떠나온 별이 보였다

터진 이마를 손바닥으로 누른 채 나는

보도에 주저 앉았다

돌멩이는 분명 이유가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유를 몰라 괴로워했다

허공 속으로 돌멩이 하나가 날아가다 멈추었다

멈춘 돌멩이는 그 자리에 있었다

이마를 누르고 있던 손을 내리고 나는

내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손바닥에는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

이마에도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버스도 끊어졌다

나는 걷기로 했다

이마를 만지면서 울먹였다

 

 


 

 

이정주 시인 / 홍등

 

 

이삿짐을 싣고 트럭이 지나간다. 점 보는 집이 지나간다. 얼굴 찢긴 후보들이 지나간다. 허벅지를 드러내고 화투치는 여자들이 지나간다. 붉은 등 아래 담배를 물고 서 있는 여자도 지나간다. 붉은 등이 그립던 날들과 엥겔스가 옳다고 생각한 날들이 지나간다. 보리밥집과 나무문 만드는 집 나무문이 닫힌다. 보리밥은 식어 있다. 길가에 나와 있던 여자가 없어졌다. 붉은 얼굴의 여자들을 누이라고 생각하던 날들이 돌아온다. 외등이 꺼지고 점포 안이 붉다. 술상을 보는 여자들 뒤로 숨는 엥겔스가 보인다. 나는 빈자리에 차를 집어 넣는다. 붉은 얼굴로 졸고 있는 푸줏간 여자가 보인다.

 

 


 

 

이정주 시인 / 파묻힌 시인

 

 

나는 모른다. 내가 묻힌 산 위에 솟은 탑을 모른다. 탑 속에 갇힌 뜬눈의 밤을 모른다. 경 읽는 소리가 탑에 달아주는 구리 방울을 모른다. 탑이 솟으매 일그러진 하늘을 모른다. 모를 곳에서 외면하는 꽃잎들을 모른다. 꽃잎이 몸을 눕히는 치마폭을 모른다. 치마엔 조금씩 물이 들고 물이 든 여자도 울었는지 울다가 잠들었는지 모른다. 모른다. 다시 땅 속에 묻힌 탑이 흙이 되었는지, 구리 방울은 녹슬어 버렸는지, 동자승 하나가 싸리비로 무슨 노래를 쓸어내는지.

 

 


 

이정주 시인

1953년 경남 김해에서 출생. 부산대학교 약대 약학과 졸업.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외국문학》 편집장 및 출판사 편집장 역임. 시집으로 『행복한 그림자』, 『문밖에 계시는 아버지』, 『의심하고 있구나』, 『홍등』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