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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복희 시인 / 지느러미의 본능
폭우 끌어당긴 가문비나무 한 그루 날비린내를 풍긴다 일시에 펄럭거리는 바람의 결 따라 비릿한 냄새 창문 넘을 적마다 구석구석 돋아나는 비늘, 오만 년 전 잃어버린 꼬리지느러미 주변부가 근질거린다 지느러미가 양귀비꽃처럼 돋아나면 수중 곳곳 드나들 수 있겠다
수초 사이사이 피라미들 불빛 쪽으로 고개 드는 새벽녘 쏘가리가 쏘아 올리는 파문이 상형문자로 뜨고 두 발 얻으면서 사라진 꼬리가 가슴에서 자라는 나는 물에서 퇴화된 종족 천년을 뛰어넘어 전해진 수면 위 네가 보낸 글자를 해독하느라 양팔 벌린 자세로 종일 서 있다
금강 물길 뒤집어질 때마다 빗길 뚫고 달려가 강둑에 서는 것은 지느러미 본능 탓 돌아가고픈 숨죽인 기대가 황토빛으로 뒤집어져 흐르기 때문 나무가 품고 있던 물고기 떼 먹장구름 따라 우루루 몰려가는 곳으로 꼬리지느러미 힘차게 방향을 튼다
도복희 시인 / 낭만적 우울에 대한 처방전
동방마트에서 사온 햇소금 한 수저와 당신을 밀어내고 남은 공허 한 줌을 섞어 세상에서 제일 심심한 오븐에 구워내면 씹지 않아도 넘어가는 쿠키 다섯 개쯤 된다 그것을 적당히 갈라 때마다 끼니로 대체하면 그런대로 평온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간간 바람과 햇살을 공복에 복용하는 것으로 경미한 우울증을 넘기기도 한다
소스리바람으로 제조한 것보다는 골 바닥에서 산마루로 불어 올라간 것을 이용하는 편이 재발 방지에 도움이 된다 햇살의 양은 조절이 필수적이다 절대적으로 과부하 상태를 막아야 한다 포플러 잎새에서 정제된 빛이 최상의 조건 주로 이른 아침 갓 따낸 태양을 활용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부작용으로 심한 알러지 증상을 보일 수 잇으니 먹장구름이나 안개를 주의할 것 비상시를 위해 비타민제와 수면안대를 준비할 것 호흡곤란이 올 경우를 대비해 소나무에서 추출한 산소통을 항상 가까이 비치해 둘 것 쿠키의 장기 섭취는 혈압의 수치를 떨어뜨려 삶에 대한 의욕을 제거할 수 있으니 조심할 것
이상을 실연을 시련으로 받아들인 낭만적 우울에 대한 민간요법으로 체질에 따라 속성으로 치유되기도 하나 간혹 평생을 복용하고도 개선되지 않는 특이 체질이 있다
도복희 시인 / 허물을 벗다
파란 양철대문 옆 삐딱하게 자리 잡은 등받이 나무 의자 구름을 앉히고 바람을 품던 몸 반질반질 닳아 있다 이른 저녁밥을 물리고 앉은 노인의 눈이 어둠 안으로 파묻히는 골목을 바라본다 되풀이해 온 여느 날처럼 새 떼 한 무리 하늘을 끌고 가는 동안 한낮 폭염에 지쳐버린 바람이 맨발 위에 머문다 투두둑 떨어져 내리는 웃음소리 간간 들려오는 담장 안 농익어서 스스로 떨어지는 까만 분꽃씨 뜸들어가는 밥 냄새를 잊을 수 있을까 그의 등이 의자 깊숙이 파묻히고 상수리나무가 먹빛을 뒤집어쓴다 능소화 툭툭 떨어져 있는 그늘에 능구렁이 한 마리 허물 벗어두고 달의 입구로 미끄러져 간다 그의 발에서 흘러내린 뒷굽 닳은 신발 한 짝 이슬 맞으며 대문 밖에 놓여 있다
도복희 시인 / 그늘의 냄새
그네를 타고 있었죠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높이 날아올랐죠 바람이 손톱을 세우고 귓불 할퀴어도 통증이 되살아나지 않았죠 구르지 않아도 하늘로 올라가는 텅 빈 운동장 그네 위 둥실 떠오르던 몸이 한순간 땅바닥에 곤두박질쳤죠 박살난 뼈마디가 살을 뚫고 나왔는데 하나도 울지 않았죠 늘 혼자이던 그림자 안 그 애가 목매단 닭들에게 모이 던져주며 상처를 부풀리고 있었죠 자살한 엄마의 그늘 아래서 자라지 못하는 그 애 마른 눈물 바라볼 때도 심장 박동 수는 일정하게 간격을 맞추고 있었죠 검은 집 담벼락이 담쟁이덩굴 무덤이 되고 겨우내 끊이지 않는 곡소리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갔죠 흉물이 되어버린 그 집 내력에 두 귀 닫아버린 사람들 아침과 저녁이 딱딱하게 흘러가고 있었죠 아무것도 아파하지 않으려고 겨울이 지나갈 때 검은 나무 감은 눈마다 뾰족한 이파리 마디마디 장전하고 있었죠 쉿, 조심하세요 당신 가슴에 탄피가 박힐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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