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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숙 시인 / 논노패션
매연이 보풀처럼 엉켜 잘 끊어지지 않는 골목, 논노패션 여자는 동대문에서 묻혀 온 졸린 눈꺼풀들 탈탈 털어 건다 피곤도 액세서리처럼 주저리주저리 걸린다
정희네 실밥 터진 옆구리 수십 번을 누볐고 적금통장이 털린 박 양은 잘못 물린 지퍼에 살갗을 뜯겼다 윤희 할머니는 쌀 두 가마에 황톳길 너머로 시집을 왔고 진안 댁은 흉년을 견디다 못한 오라비 손에 이끌려 재취가 됐다는, 박리 지만 환불이 안 되는 논노패션 골목
너무 늦게 생(生)의 안감을 뜯어내는, 논노패션 여자들은 유행을 쫓아가지 못한다 저녁이 멍 투성이처럼 흘러내리는 골목 정희네 환불이라도 받아 낼 요량인지 이를 악물고 집을 나온다 개도 달도 따라붙지 않는 한밤중이다
기명숙 시인 / 북어
살점이 뭉텅 빠진 들쑥날쑥한 몸 하나 허공에 걸려있다
쾡한 눈알을 바람이 핥고 지나가자 파르르 눈가의 잔주름이 흔들린다 헤쳐가야 할 길을 또렷이 바라볼수록 굳은살처럼 딱딱한 몸은 야위어간다 그 해 누군가 억센 손으로 그의 내장을 파내고 그 속에 단단한 뼈대를 세웠다 그의 몸 바깥에서 느닷없이 아카시아꽃이 펑펑 지고, 군화자국이 지나간 자리마다 비늘 같이 꽃잎이 소복하게 쌓였다 바람 불어 허공이 저 혼자 우는 밤, 그는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뻣뻣해졌다
스물다섯 해, 맷집 하나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사는 북어가 있다 상한 지느러미 곧추세워 풍향계처럼 헤엄치려 하는데 아무도 그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우리 큰오빠…… 떠나야 한다, 떠나야 한다 입술을 달싹이는데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기명숙 시인 / 날아다니는 꽁치
접시 위에 잘 구워진 채 퍼덕거린다 물때가 채 가시지 않은 맑은 눈을 또랑또랑 뜨고 꽁치는 지금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다 꽁치가 다시 날아가지 못하도록 젓가락들이 날렵하게 접시 주변을 들락거린다 그러다 보니 꽁치의 살과 살 사이 흰 머리카락 같은 가시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참 성가시게 달라붙어 있다 용케도 힘을 나란히 모으면서 촘촘히 박음질한 무명 천 조각처럼 가시는 끄떡없다 이 가시는 바다에서 꽁치의 몸을 찌르던 바늘이었다 바다를 벗어나고 싶은 꽁치가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을 때마다 가시는 단단해졌다 가시 때문에 아파서 푸른 물결을 뚫어야 했다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도망치다 보니 꽁치는 길쭉해졌다 그러다가 꽁치의 몸에 청회색 바다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길게 들어와 박히게 되었다 젓가락들이 바다를 뜯어먹게 놔두고
지금 꽁치는 다시 날아가려고 기우뚱 몸을 한번 뒤집고 있다 반대쪽 살이 통통하다
*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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