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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위상진 시인 / 끊기지 않는 탯줄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6.

위상진 시인 / 끊기지 않는 탯줄

 

 

발등 뼈가 아프다. 네 생일이 오나 보다.

산후조리할 때 바람 쐬지 말랬는데

그만 찬물을 발등에 부어버렸다.

너는 이 세상에 이 견딜만한 아픔으로 발등에 왔다.

시(詩)도 아이가 내게 오듯 그렇게 왔다.

끊기지 않는 탯줄 해마다 길어진다.

 

 


 

 

위상진 시인 / 바다로 내리는 잠

 

 

그는 밤마다 부적을 따라 나선다

스틸녹스 두 알을 입에 물고

가수면의 바다로 잠겨든다

더 이상 지느러미를 흔들 수 없을 때까지

잉크처럼 풀어지며 해저로 가라앉는다

 

암청색 바닷물이 이마 위로 흘러가고

형광빛을 내는 몸은 물고기 알을 낳는다

내리지 않는 잠은 심해어 울음소리를 낸다

 

그때 앞집 여자가 비틀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소리

열쇠 구멍으로 머리를 밀어넣는지 덜그럭거린다

어딘가로 핸드폰을 눌러대는 소리

 

 

밤의 소리들이 달팽이관에서 비틀거린다

어디서 잠의 노래가 들려오나

남아있는 비상약 한 알을 삼키고

잠은 더 깊은 어둠으로 흘러드는데

 

앞집 여자는 밤을 두드리고, 두드리고

 

*스틸녹스 : 수면제

 

 


 

 

위상진 시인 / 길 혹은 고양이

 

 

1.

 

종로 3가 지하도 낯선 음악이 울리고 있다 안데스를 넘어 온 차고 맑은 선율, 까무잡잡한 얼굴에 치렁하게 묶은 머리, 키 작은 악사들이 물안개처럼 피워내는 미소, 지하로 날아든 십일월의 철새 같은 엘 콘드르 파사

 

쓸쓸하고 달콤한 팬플룻 소리, 하늘로 울리던 의식 같은 음악은 오후 세 시의 지하 사막을 건너간다 안데스 계곡을 감아 돌던 바람은 갈 데 없는 노인들을 덮어주고 철새는 날아가고

 

2.

 

북경 천지극장, 사내아이가 반 쯤 늘어진 줄 위를 간다 아이가 밟고 가는 줄이 흔들리며 절벽으로 떨어진다 몸을 돌려 그네를 탄다 숨죽여 증발하고 싶었던 울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져 줄 위에 얹혔네 적막한 그림자가 뛰어내리며 밀려난다

 

3.

 

눈 내린 길 위에 발자국이 젖어들고 있다 고양이 한 마리, 납작한 배에 그림자를 달고 검은 비닐봉지를 따라간다 고양이 발에 찍힌 길이 파랗게 돋아난다

 

*엘 콘도르 파사 : 페루의 민속음악 ‘철새는 날아가고’로 우리나라에 아려졌고, 사이먼 가펑컬이 불러 유명해진 곡.

*산뽀냐 : 팬플룻 같이 대나무관을 나란히 묶어 앞과 뒤의 단이 지그재그 모양을 한 안데스 전통악기.

 

 


 

 

위상진 시인 / 수족관

 

 

불꺼진 수족관의 물고기는 거기가 바다인 줄 알까 저녁 어스름 사이에서 별이 가물거릴 때 비늘이 해진 입을 벙긋거리며 빛을 따라 옮겨 다니네

 

시간은 글씨가 사라진 양피지 같아 어둠은 지워진 문장을 다시 쓰게 하네 물고기의 흐린 눈은 물소리를 찾아가고 나는 더듬거리며 문을 그리네

 

창가에 걸린 마그리트 그림 속의 여신은 하얀 대리석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기억을 쏟아낸다 바다는 수평선을 끌어내려 구름을 가둬놓고

 

그 안에 흐르던 물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밤의 유리창은 꺼진 티브이처럼 캄캄해 검은 거울 속에 나는 담겨 있네 밤이 기억을 찍어 전송하는 동안 블라인드를 내리네

 

 


 

 

위상진 시인

대구에서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1993년 월간 《시문학》에 <吉印堂>외 5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햇살로 실뜨기』(시문학사, 2001), 『그믐달 마돈나』(지혜사랑, 2012)가 있음. 2007년 「푸른시학상」수상. 2016년 시문학상 수상.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2011.2019). 재)심산문학진흥회 사무국장. 사)국제pen한국본부 기획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