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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 시인 / 용산을 추억함
폐수종의 애인을 사랑했네 중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용산우체국까지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한강로 거리를 쿨럭이며 걸었네 재개발지구 언저리 함부로 사생된 먼지처럼 풀풀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시의 몸 구석구석에선 고질의 수포음이 새어나왔네 엑스선이 짙게 드리워진 마천루 사이 위태롭게 선 담벼락들은 저마다 붉은 객담을 쏟아내고 그 아래 무거운 날개를 들썩이던 익명의 새들은 남김없이 철거되었네 핏기 없는 몇 그루 은행나무만이 간신히 버텨 서 있었네 지난 계절 채 여물지 못한 은행알들이 대진여관 냉골에 앉아 깔깔거리던 우리의 얼굴들이 보도블록 위로 황망히 으깨어져갔네 빈 거리를 머리에 이고 잠든 밤이면 자주 가위에 눌렸네 홀로 남겨진 애인이 흉만(胸滿)의 몸을 이끌고 남일당 망루에 올라 오, 기어이 날개를 빼앗긴 한 마리 새처럼 지옥불 일렁이는 아스팔트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쳐가는 불온의 미몽이 사이렌처럼 머릿속을 낭자하게 물들였네 상복을 입은 먹구름 떼가 순식간에 몰려들었네 깨진 유리창 너머 파편 같은 눈발이 점점이 가슴팍에 박혀왔네 한숨로 피워낸 시간 앞에 제를 올리듯 길고 긴 편지를 썼으나 아무도 돌아올 줄 모르고 봄은 답장이 없었네 애인을, 잃어버린 애인만을 나는 사랑했네
박소란 시인 / 미역
미역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밤 이끌리듯 불 앞에 서서 한 냄비 미역국을 끓였을 뿐인데 허겁지겁 한 덩이 찬밥을 말았을 뿐인데
사라지지 않는다 이불 속으로 손을 뻗으면 한 줌 미역이 무섭게 엉긴 한 다발 머리칼이 빈 몸을 휘감고 빈 방을 넘실거리고, 살려줘 애걸하는 모양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미역은,
대체 무엇일까 책장 가장자리 크고 두꺼운 책을 찾아 펼치자 미역은 있다 어김없이 핏기를 잃은 종이 위에 목이 꺾인 활자 위에
입가에 마른 미역 부스러기를 묻힌 채 떠도는 창밖의 사람을 바라보다가 당신도 미역국을 먹었습니까 한 마디 건넸을 뿐인데 한 차례 눈을 마주 보았을 뿐인데
그는 몹시 운다 갈 곳을 모르는 귀신같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뜨거운 물속에 잠긴다
미역은 순식간에 불어나 짭조름한 살냄새를 피우고
누구의 생일입니까 오늘은 누구를 위해 미역국은 끓고 있습니까
사라질 듯 사라질 듯 한 그릇 밤이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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