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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함기석 시인 / 고유한 방화범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6.

함기석 시인 / 고유한 방화범

 

 

나의 구두는 우주선

밤마다 내 두개골을 싣고 밤하늘을 유영한다

나의 구두는 잠수함

밤마다 황산으로 뒤덮힌 바다에 나를 내다버린다

 

구두는 나의 육체 나의 무덤인 언어

구두는 자신의 전생애를

구두라는 제 이름의 새장에 갇혀

병든 새처럼 고통스러워하며 상처받는다

 

사물의 이름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단단한 감옥

인간이 인간만을 위해 만들어놓은 무서운 질서

무서운 폭력, 나는 밤다다

검은 복면을 쓴 방화범이 되어

그 감옥 지하실에 폭약을 설치하고 불을 지핀다

내 육체 속에서 번식하는 내 아비의 우상들을 죽이고

발 아래 침묵하는 대지를 살해한다

 

시인은 제 피와 뼛가루가 묻은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의 교수대와 관을 만들어야 한다

치열하게 유희하듯 유희하듯

 

장미를 계속해서 장미라 불러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수백 마리 뱀들이 우글거리는 관(棺)인 그것을

나는 간단히 시체라 부른다

이제, 장미는 빠알간 나의 시체

나는 밤마다 나의 시체에 불을 지른다

 

시인은 모두 방화범이 되어야 한다

썩어가는 세계의 항문과 사타구니에 불을 지르는

고유한 방화범이 되어야 한다

 

<<국어 선생은 달팽이>>, 세계사, 1999, 67-8쪽

 

 


 

 

함기석 시인 / 아픈 방

 

 

  난 이 시 아픈 방이오 이렇게 찾아주셔서 고맙소 어서 들어 오시오

왼쪽 벽에 스위치가 있소 누르지는 마시오 난 이대로 어둠 속에서 쉬고 싶소 불을 켜면 당신은 벽을 타고 흐르는 피, 의자 밑에 떨어진 떨어진 손을 보게 될 거요 난 그런걸 당신께 보이고 싶지 않소

 

  가만히 서서 책상을 바라보시오 책상은 칡넝쿨로 뒤덮여 있소

책상 밑으로 흐르는 계곡이 보이오? 계곡은 당신이 서있는 벽을 타고 천장 밖 당신이 살던 세상으로 흐르고 있소 얼마 전까지 이 방엔 한 여자가 살고 있었소 그녀는 스스로 숨을 끊고 계곡을 따라 당신이 살던 세상으로 떠났소

 

  0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 창을 찾아 보시오 창은 말의 동공처럼 어둡게 깨져 있소 거기 서서 0시의 바깥세계를 바라보시오 밤의 잿빛 도시가 보이오? 도시의 강변 저편에 빌딩들이 보이고 아파트단지가 보일 게요 불 켜진 방이 하나 보일 게요  시를 읽고 있는 사람이 보일 게요 누군지 아시겠소? 아픈 방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이오

 

  당신에게 손이라도 흔들어 주시오 그 사람도 나처럼 아픈 방에서 홀로 아파하고 있을 게요 가서 그랑 술이라도 한 잔 하시오 미안하오 이제 난 약을 먹고 쉬고 싶소 그만 나가주시오 당신이 이 방을 나설 때 여자의 손이 당신을 따라 갈 것이오 그럼 좋은 밤 보내시오

 

2008 <시인세계> 여름호

 

 


 

 

함기석 시인 / 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

 

 

흉부가 기타로 변한 여자가 어둠 속에서

늙은 몸을 조율하고 있다

심장을 지나는

여섯 개의 팽팽한 핏줄들

 

눈을 감고 첫 번째 줄을 끊는다

금세 깨질 것만 같은 울림통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핏물이 저음으로 흐른다

 

기억은 동맥으로

망각은 정맥을 타고

심장 아래

시간의 텅 빈 자궁 속으로 흐른다

 

여자는 어둠을 안으로 삼키고

두 번째 줄을 끊는다

음의 물결 사이로

죽은 아이의 얼굴, 말들의 울음이 떠돌고

구름이 흘러나온다

내장이 훤히 비치는 구름

 

마지막 줄을 끊자

아이가 잠든 숲, 숯보다 어두운 숲의 지붕으로

연못이 떠오르고

여자의 몸이 묘비처럼

밤의 낮은음자리표 쪽으로 기운다

 

시간이 타버린 얼굴엔

검은 반점들이 추상문자로 남아 있고

핏물은 점점

소리 없는 음이 되어

생의 늑골 밑으로 어둡게 번져간다

 

신음 속에서 0번 줄을 퉁긴다

울림통 가장 밑바닥 샘에서 통을 깨는 음

침묵이 흘러나온다

아이가 기르던 은빛 물고기들이 나와

공중의 연못으로 헤엄쳐가고

시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0시의 바깥세계로 날아간다

 

하늘엔 주름진 바위

누가 악사의 혼을 저 어둡고 축축한 천공에 옮겨놓았을까

기타에 붙은 두 손이

흰 새가 되어

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간다

 

《현대시》2008년 10월호

 

 


 

함기석 시인

1966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1993년 한양대학교 수학과를 졸업. 1992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국어선생은 달팽이』(세계사, 1998)와 『착란의 돌』(천년의시작, 2002), 『뽈랑공원』(랜덤하우스, 2008) 그리고 동화 『상상력 학교』(대교출판, 2007)가 있음. 2009년 제10회 '박인환문학상' 수상. '제14회 눈높이아동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