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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우진용 시인 / 나무 시인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6.

우진용 시인 / 나무 시인

 

 

나무는 시인보다 더 시적이라고

상투적인 언사가 아니다.

초록으로 세상을 점령한 위세에 눌려서도

철 늦은 빈 가지 쓸쓸한 뒷모습 때문도 아니다.

밑둥치 남기고 트럭에 실려서 간 뒤,

비로소 그가 남긴 둥근 시구를 보았다.

어느 시인이 온몸으로 제 나이를 그리겠느냐.

나도 나이테를 두를 줄 아는 나이가 되었는가.

담 벽에 기댄 채 묵묵히 깊어가는 그의 그림자.

채머리 흔들며 아니다아니다 이마에 스친 바람도

머리 풀며 취하도록 빗물에 흠뻑 젖었던 날도

돌아보면 한 시절 삭정이처럼 삭이게 되었는가.

겨울 초입, 가로등 불빛 아래 서 있는 그를 본다.

마지막 남은 잎새 몇 장 발밑에 내려놓고

한 해 단 한 줄만을 남길 줄 아는 그는

온 몸으로 테를 두른 계관 시인이다.

 

김명배문학상 수상자 시

 

 


 

 

우진용 시인 / 지하철 3호선

 

 

오금에서 대화 가는 3호선은

졸면서도 생각하며

가야하는 선.

 

지렁이처럼 땅 속으로 기어가서

 

대화좀 하자고 끝내 매달려도

오금이 저려서 되돌아오는 선.

 

당신과 내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선.

 

삶도 사랑도 그러면 못쓴다고

말없이 흔들면서 깨워주는 선.

 

나와

당신의

지하철 3호선

 

 


 

 

우진용 시인 / 민주, 모순의 장미여

 

 

백성 民, 그 아래쪽

비스듬한 십자형은

눈을 찌르는 창으로

눈먼 노예라는 글자.

 

(국민의 의무가 자꾸

노예의 의무로 읽히네)

 

주인 主, 등잔대에 켠 불.

바람 불면 꺼진다 하니

그래 마음속 촛불을 켜자.

꺼지지 않는 주인이 되자.

 

불을 켜지 않으면 세상은 어둠

촛불의 눈물이 외로이 빛나는데

돌아보니 아, 모두가 촛불사람.

마음에 主 하나씩 켠 촛불사람.

 

민주야 너에게로 가는 길은

노예가 주인으로 눈뜨는 길.

새 세상은 늘 변방에서 오고

민주는 피를 먹고 자라는 장미.

 

민주야 스스로의 모순아.

오늘도 光化門 너의 눈물로

主의 촛불 하나씩 꽃피우며

화엄의 붉은 바다로 출렁인다.

 

 


 

 

우진용 시인 / 고택

 

 

추사의 기침소리 들림직한

고택의 가지런한 기와들은

조선의 질서체계가 아니다.

 

섣달 그믐밤 익어가는

장독 속 묵은지 같은

 

역사이다.

 

어둠과 별빛으로 써내리다

기왓골 바람으로 흐르는

 

음률이다.

 

긴긴 겨울밤 나의 귀에

속삭이는 오백 년 된

 

고적이다.

 

 


 

우진용 시인

1955년 출생.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등단. 2005년 웅진문학상 수상. 2006년 문예진흥기금 수혜대상자로 선정. 충남시협작품상 수상. 시집 『흔(痕)』 『한뼘』, 교육서 『한자어에 숨은 공부 비법』.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당진 원당중학교 교장. 중등교장 퇴임 후 숲해설사로 <나무 인문학> 강연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