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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란숙 시인 / 가야금을 뉘어 놓고
무릎 위에 가야금을 뉘어 놓고 영창을 구성지게 넘어가는 노을의 음계 하나하나 손가락 끝으로 맥을 짚어보고 싶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눈 감고 서쪽으로 다정히 흐르는 강물의 담담한 맥도 때론 잡힐 것이고 어떤 날은 집 안 가득 그리움을 피워 놓고 마루에서 댓돌로 댓돌에서 마당으로 마당에서 작약꽃 만발한 대문간으로 흰 버선발 동동 구르는 명랑한 발목의 맥도 짚어보고 싶네 달이 잠긴 깊은 우물 속 익은 감잎 떨어지는 무주공산(無主空山) 그 뛰노는 슬픔의 푸른 맥도 잡히곤 하겠지
―엄란숙 `가야금을 뉘어 놓고’
엄란숙 시인 / 주시
그대에게 활을 겨누었소 서라벌 온 산천이 골골이 만산홍엽의 치마를 두르고 이마를 적시는 물소리 남산을 뛰어올라와 붉은 구름의 말을 전하오 맨발이었던 나를 기억하시는지 그대에게 빈 마음으로 달려들던 그 하루를 기억하시는지
천 년쯤 눈빛을 주실 듯 손가락 마디마디 가락지를 끼워 걸며 말발굽 소리 요란하게 말위에서 속닥이며 들판을 가로지르고 물살을 가로지르고 지친 이 마음까지 가로지르고, 가로지르고
그대에게 활을 겨누었소 별리란 주시를 벗어난 것, 왼눈을 감아보오 오직 오른 눈 속의 그대만이 중심 온전한 나의 그대임을 오른 눈을 감고 보는 능수버들 곁에 선 그대는 이미 나의 그대가 아니요
파들파들 뛰는, 이 붉은 눈동자 그대에게 활을 겨누다 아마도 나는 오른 눈을 감을 것이요 주시의 아픈 화살은 고함 소리를 지를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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