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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현연 시인 / 사육제
1
나는 죽은 줄도 모르고 빵을 자른다 나는 죽은 줄도 모르고 그것을 먹는다
빵 속 갇혀 있던 묵은 공기들이 후욱 밀가루 냄새 터트리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빵의 내부는 싸늘하고 축축하다 무방비 상태로 물어뜯기는 빵 조각 우적우적 씹어대는 나의 이빨 뒤에서 붉은 위장이 꿈틀꿈틀 몸을 꼬아댄다 어서 나를 터질 듯이 채워줘 꽉꽉 빈 틈 없이 채워줘
침에 젖은 빵 조각은 체념한 듯 몸을 웅크리고 부글거리는 위액 속으로 사라진다
2
나의 식탁엔 매일 작은 사육제 챙강챙강 칼과 포크의 은빛 亂舞 사과를 깨물어 먹은 만큼 내가 무거워지고 사과가 가벼워진 만큼 끈적이는 과즙이 흘러넘치고 아드득 사과는 사과의 언어로 비명 지른다
예현연 시인 / 내창밖 고양이
붉은 철계단을 올라가면 곱슬곱슬 머리 지져붙인 내가매일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콩을 까고있어 콩깍지를 벌려보면 칸칸마다 검은콩 검은콩 얼룩콩 나는 콩들을 흝어 내려 바가지에담고 아이가 자지러지게 물고 동시에 냄비의 국물이 끓어넘치고 동시에 뜻밖의 손님은 자꾸만 초인종을 눌러대지 바라보는 동안 앞집의 양철지붕은 빛이바래고 수천가지 모양의 구름이 하늘에 나타났다 흝어지고 졸다 깨어보면 플라스틱 바가지는 엎어져있고 내가 흩어진 콩을 주워 모을 때 웅크린 등뒤로 스쳐가는 얼룩고양이 아이가 눈을 묻은 얼굴로 잠들고 문밖의 손님이 돌아서고 내가가스렌지 불을 끄고 부엌창을 열때 앞집지붕 위로 지나가는 얼룩고양이 나는고양이를 바라보다 이내 잊어버리고 고양이도 나를 돌아보지않고 끝없이 잇닿은 지붕위로 걸어가지
한국일보 [당선작] 예현연 시인 / 유적
금간 항아리 사이로 그녀와 내가 교차한다 비어있는 것들을 배경으로 그녀는 흐릿하다 先史보다 아득하게 먼지낀 세월이 두터운 유리벽으로 앞을 가로막는다 古代의 여인이 회갈색 미라로 누워있다 유폐된 황녀의 마지막은 고통뿐이었다 벌린 입 속 수천년을 견딘 치아들이 온통 틀어졌다 푸른 비소 알갱이 갈앉은 자기병이 그녀의 유품이다 벽옥 파편들은 멸망한 족속의 文字처럼 어지럽다 지하 전시관에서 부식되는 황녀의 초상 흩어진 채색, 이제는 밑그림만 남았다 낯선 유적에서 마주치는 그녀와 나의 낡은 눈동자 저 자기병에 맺힌 유약은 수천년 전부터 글썽여온 울음이다 그녀도 엇갈리는 因緣 속에서 때론 그 실오라기를 애써 끊으며 살았을 것이다 붉게 힘준 잇바디 고리 끊어진 장신구는 한때 그녀의 저녁을 치장했다 가슴팍에서 사그락대던 벽옥 구슬들은 한순간 쉽게 끊어져 내렸다 멀리까지 굴러가는 구슬을 멍하니 보고 있는 그녀 그러모아도 쥐어지지 않는 것들을 놓아버린 순간이 遺蹟의 저녁이다 불이 꺼진다 폐관을 알리는 안내 방송만이 어지럽고 출구를 가리키는 비상등은 꺼져버린다 어둠 속에서 모든 금간 유물들이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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