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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진기 시인 / 달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6.

양진기 시인 / 달력

 

 

시한부 삶이 못 박혀 있다

무거운 날들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칸칸이 봉인했다

붉게 찍힌 숫자에서 피 냄새가 난다

 

빨간 7은 교수대에 매달린 사람같아

도려내니 뒷장은 빨간 4

사법살인

인혁당 사형수들의 늘어진 사지가 보인다

4ㆍ3 과 4ㆍ19

붉은 4에는 화염이 타오르고 피가 고여 있다

 

까만 4는 문상의 나날들

날마다 검은 리본을 달고 있다

아무 일 없는 날은 얼마 되지 않아

굵은 기호들, 작은 글씨들이

다닥다닥 무언가를 표시하고 있다

 

무거운 날들이

가볍게 벽에 붙어 있다

 

시집『신전의 몰락』 中에서ㅡ

 

 


 

 

양진기 시인 / 냉장고와 어머니

 

 

냉장고가 운다

어둠 속에서 낮게 흐느끼다가

인기척을 느끼면 울음을 뚝 그친다

한밤중에만 캄캄하게 우는 냉장고

 

어머니가 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자식들 앞에선 언제나 강했던 어머니

어두운 골방에서 저리도 낮게 흐느끼셨다

 

슬픔을 동결시킨다

터지는 호곡을 가슴속에 우겨 넣는다

얼어붙은 울음들이 냉동실에 빽빽하다

 

- 계간 리토피아 겨울호에서

 

 


 

 

양진기 시인

제주에서 출생. 2015년 《리토피아》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신전의 몰락』(2017 세종나눔도서)가 있음. 막비시동인으로 활동 중. 성남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