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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태관 시인 / 시간을 돌리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4.

이태관 시인 / 시간을 돌리다

 

 

시장 모서리

낡은 턴테이블이 시간을 돌리고 있다

가슴 한 켠에 연결된 대나무의 긴 팔이

그녀를 대신해 파리를 쫒고 있다

바다를 파는 걸쭉한 그녀의 입담은

감미로운 음악이다

자신의 몸을 자식에게 내어 주는 염낭거미처럼

텅 비어버린 그녀의 온몸은

언제나 소리통이다

날마다 새로운 바다가 들어차고

그녀의 재빠른 손놀림에

바다가 얇게 썰리어지지만

비워낸 만큼

그녀의 몸에도 달이 들어찬다

돌고 도는 게 생이라면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긴 연주가

자신의 삶이었음을 알아 차렸다

언제나 한 방향을 향하는

낡은 레코드

바다를 보지 못한 그녀의 손등에

비늘이 돋는다

싱싱한 활어가 된다

시장 통을 헤엄치는 저 푸른 목소리

 

그곳에 가면

시간을 돌리는 주름진

늙은 고래가 있다

 

 


 

 

이태관 시인 / 그때, 나는 전역중이었다

 

 

  밤꽃향기 가득한 유월, 집을 향하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던 그 때, 나는 전역 중이었다

짧은 물방울 원피스 노란 슬리퍼를 신은 그녀가 내 옆에 앉았을 때 나는 음모의 냄새를 맡았다 애인으로 대해 달라던 그녀가 내게 원한 건 자신을 찾는 이들의 눈을 피해 도망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세계에서 탈영 중이었던 것이다 밤꽃 속으로 버스는 달리고 나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어디를 에돌다 왔는지 바람에 나풀거리는 그녀의 치맛자락 속에선 푸른 구름이 피어올랐다 텅 빈 동공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지금, 내게 맡겨졌던 한 생에서 전역하였듯 그녀도 전역 중이었던 것이다 밤꽃 피면 떠오르는 그녀,

나는 밤마다 전역중이다

 

 


 

 

이태관 시인 / 세상에서 가장 빠른 닭에 관한 보고서

 

 

  한 사내가 차를 뽑았다. 한적한 시골길을 애인과 휘파람 불며 달리고 있었다. 그 곁을 스쳐 지나는 닭. 사내는 제 눈을 의심했으리라. 속도 게이지를 확인한 후, 힘껏 엑셀레터를 밟았다.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사내가 느긋이 후미경을 바라보았을 때, 어느새 닭은 차 앞을 가로질러 양계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 닭을 가질 수 있다면 많은 돈을 벌 수 있겠구나 생각한 사내가 농장 주인을 찾았다. 닭을 팔라는 사내의 말에 농장 주인은 고개만 절래 절래 흔들었다. 한참의 실갱이 끝에 사내가 물었다. 도대체 팔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요? 주인이 대답했다. 야! 이놈아 잡혀야 팔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있나니

저 닭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는 것

지금 네 곁에 있는 모든 것들

 

* 인터넷에서 떠돌던 유머를 재구성.

 

 


 

 

이태관 시인 / 들깻잎도 저녁이 되면 문을 닫아건다

 

 

저녁이 되니

자귀나무의 푸른 잎들이

서로 기대어 잠이 듭니다

마냥 신기해하는 제게

어머니가 한 말씀 하십니다

-애야, 자귀나무만 그런지 아니? 깻잎도

저녁이 되면 문을 닫아건단다

 

바람이 빗질한 자리마다

꽃 피어나고

그 자리마다 꿈이 자리잡는 들깨의 방

까맣게 익어가는 알들을 위해

저리도 들깨의 푸른 잎들이

두 손을 모아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나니

 

날 저물어

한 방에 모여 자는 저 어린 것들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여 잠을 청하네

다섯 식구 편히 발 뻗지 못하는 그 뽀얀 꿈길

바람이 가만히

어루만지네

 

 


 

 

이태관 시인 / 파리 날다

 

 

조롱박 위를 구르던 바람이 어느새

창문을 넘었나 보다

며칠 째 펼쳐놓은 책갈피 위를 뒹굴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듯 살며시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파리 날다

넘어지려는 한 세계 위에 앉아

가만히 그네를 탄다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와

마음이 가 닿는 그 간극,

 

파리 날다

휘둘린 파리채에 제 몸을 낮춘다

 

한 세계의 문이 닫힌다

 

 


 

 

이태관 시인 / 사이에서 서성이다

 

 

늦은 저녁 알밥을 먹으러 간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알콩달콩 살라던 예식장이

장례식장으로 바뀌어 있다

삶과 죽음 사이는 얼마나 되나

달궈진 뚝배기에 알이 익는다

씨앗 품어줄 땅에 허리 조아리듯

밥상 위에 조배한다

 

살아 있는 물고기는 소금물에 절여지지 않지

초례청에서의 기억이 남아 있었나

장례식장 앞, 머리 흰 노인

마음보다 먼저 몸이 허물어지고 있다

반짝, 달이 빛난다

 

그러는 사이

앰뷸런스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가고

알이 터진다

 

갈라진 삶과 죽음 사이에서

내 몸이 부화하기 시작한다

 

 


 

 

이태관 시인

1964년 대전에서 출생. 1990년 《대전일보》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시집으로 『저리도 붉은 기억』(천년의시작, 2003)과 『사이에서 서성이다』 (문학의전당, 2010) 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