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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신선 시인 / 물도 때로는 불길이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7.

홍신선 시인 / 물도 때로는 불길이다

 

 

서울 아파트 거실서 지내던 난 화분들을

시골집으로 데려와 마당에 내놓는다.

어리둥절 며칠 뒤 난 잎에 거뭇거뭇 흑반이 끼기 시작한다.

하나둘 예외가 없다.

긴 잎은 가운데가 갈라지고 이내 잎끝부터 마른다.

결국 실내에서 컸던 난 잎들

모두 말라 떨어진다. 지난날 강직함을 털썩털썩 내려놓는다.

자디잔 난석 틈에는 새 촉들이 솟는다.

품새의 크기와 색깔을 바꿔 밀어 올린 저 민낯들

낯선 바람과 햇볕에 근성 바꿔 어울리는

단순 적응인가 방어인가

머잖아 죽을 자리 잡는 짐승인 듯

여기 으늑한 산골 마을을 골라 나는 왔다.

귀촌은 도연명(陶淵明)이 원조지만 이 구석진 동네 아무개로 와

새참에 몇 잔 털어 넣는 막소주가

허기진 내 내벽에 홧홧한 불길로 치붙어 오르는데

저는 무엇에 허기졌는가 자질한 고랑물이 터앝의 두둑마다

흙을 머금고 위로 위로 치솟는 걸 본다.

보고 있으면 꼭 절정까지 솟구치는 불길이다.

퇴경(退京) 전 달래고 쓰다듬던 서울을 내려놓고

적응인지 방어인지

본색을 바꿔 가며 이즘 나도 새 촉들을

절정까지 푸른 불길들로 밀어 올린다.

 

 


 

 

홍신선 시인 / 먼 길

 

 

때 없이 시간이 기어 오르내린 벚나무 아름드리 둥치엔

겉껍질 틈새 실낱의 고샅길이 나 있다.

그 길로 올해도 긴적없이 왔다 가는 봄 한철

이제 나도 하직하련다.

바람 없어도 때 없이 낙하하는

저 사창고개 줄지어 선 벚나무 떼구름 꽃들 속

꽃 진 자리가 더 큰 허공에게 자리 내주는

그 숨어 있는 자드락길로

내 가련다.

이 세상 너머 더 환한 세상 없어도

더러는 길 잘못 들어 옛날이 고스란히 살고 있는

과민소국 어느 낡은 집 걸쇠 따고 들어가 유폐될지라도

더러는 잘못 든 길 되짚어 나와

다시 남부여대 지고 이고 가는 유목의 뭇 마방들 뒤따라

황천의 천산북로 머나먼 길 헤맬지라도,

벚나무 떼구름들 속 내려가는

이 봄 한철의 하직 길

아파트 후문 근처 맥줏집에서 수입 맥주 한 병 입매나 하고

나도 긴적없이 휘적휘적 가련다.

앞서간 치들의 발자국 환할 일은 없지만

누구나 하늘에는 자기 길이 따로 있어 그 길 오고 갈 마련이다.

 

 


 

 

홍신선 시인 / 아, 그 나라

 

 

그 나라는 맹골수로에 전복되기 직전 직각 벽으로 기울던 대형 여객선처럼

 

이른바 난파 직전 고관, 졸부들, 정치꾼, 얼치기 기자들이 혹은 변복으로 혹은 팬티 차림으로 제일 먼저 빠져나와 도망갔다고 한다.

 

갑판 밑 선실 방방마다 구명조끼도 못 입은 채 대기하다 가라앉은

영문 모른 뭇 목숨들

머리 좋은 몇몇이나 몰살 중에 살아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격류 흐르는 서남단 심층류에 금세기 초 깊이 가라앉은,

거기 켜켜이 썩은 탐욕과 비리 속에 생금(生金)처럼 묻힌

그 어리디어린 미래가

이 시 읽는 당신이 아, 바로 그 나라다.

 

 


 

 

홍신선 시인 / 생활

 

 

A4 용지에 이즘 생활이 전폭 텅 비어 있다.

 

거기 나를 무릎 꿇려 앉히고

나는 서산대로 짚어 가며 나에게 허무경(經)을 읽힌다.

하루 한 차례씩이다.

 

진동 모드의 핸드폰이 진저리 쳤나,

그러나 막상 폴더 열면 텅 빈 액정 화면만 빠끔 내다볼 뿐

어디서고 후일담은 오지 않는다.

 

낮잠 막바지 좌심방의 어디선가

쾅, 쾅, 앞날이 무섭게 닫힌다.

아무리 귓속을 열고 털어 내도 생활은 쏟아지지 않는다.

 

싱크대에서 쌀 대껴 저녁 밥물 붓고

가늠하느라 담근 손등에 찰랑대는 후반생의 고요.

 

이때쯤 A4 용지에서 끓던 신경이

눌어붙는다. 다시 전폭 텅 비워진다.

 

 


 

 

홍신선 시인 / 단비

 

 

그만해라 그만하면 됐다 함부로 나대지 말고 그만해라

 

내리는 함박눈이 호두나무 고목의 어깨를 찍어 누르듯 어루만지고 품 안에 가로세로 두서없이 누운 논밭들을 더 깊숙이 안아 뉘는 소리. 내리는 솜눈들이 매무새 사납게 풀어헤치고 나대던 언덕 뒤 억새들도 제자리 붙들어 앉히는 소리. 궁둥짝 들썩이던 온 세상 뭇 것들 그렇게 제 자신 내면으로 내려가 들앉는데 뜨끈한 방 아랫목처럼 들앉아 혼자서 여럿이서 끼리끼리 귀 열고 수군대는 소리. 거기 대란 대치의 식식대며 들끓던 내 젊은 날 피도, 그만해라 참어라 아프기만 한 내 뉘우침도 다독여 주저앉히는 소리. 허공과 면벽한 애소나무들 누구처럼 제 팔뚝 끊어 내는지 눈발 선 산속 가득한 신음 소리. 즉설법문인가. 내 마음속 소리 죽여 듣는 함박눈 소리.

 

그만해라 그만하면 됐지. 함부로 나대지 말고 그만해라

 

 


 

 

홍신선 시인 / 뭘 허공에 쓰나

 

 

1

 

허공을 빗돌 삼아 앞에 뉘어 놓고

그가 새기고 써 내려가고자 한 최상승의 글 한 줄은 무엇인가.

 

변두리 없으니 한복판이 없고 내가 없으니 네 또한 없고

늙음 없으니 젊음이 없고 낡음이 없으니 새로움은 어디 있는가

깊음이 없으니 얕음은 어디 있는가

 

어리석어라

이미 누군가 허공을 그냥 저리 한 개 마음으로

써 놓았으니

무엇을 더 거기 새길 일인가.

 

2

 

마을 회관 앞 느릅나무 잎눈이

공중에

겨우내 피 듬뿍 찍은 붓끝을 중봉(中鋒)으로 쥐고 섰다

가끔 붓방아를 찧는다

 

뭘 허공에 쓰나

 

 


 

홍신선(洪申善) 시인

1944년 경기 화성에서 출생. 동국대 국문과 및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1965년 《시문학》 추천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서벽당집』(1973), 『겨울섬』(1979) , 『삶, 거듭 살아도』(1981), 『우리 이웃 사람들』(1984), 『다시 故鄕에서』(1990), 『다시 黃砂바람 속에서』(1996), 『자화상을 위하여』(2002), 『홍신선 전집』(2004) ,『우연을 점찍다』(2009)가 있고, 논문으로  『한국근대문학이론 연구』, 『우리 문학의 논쟁사』, 『현실과 언어』, 『상상력과 현실』등이 있음. 서울예대 강사, 안동대, 수원대 교수, 동국문학인회장 역임. 현재 동국대 문창과 교수로 재임. 동국문학상, 경기도문화상(1989), 녹원문학상(1982),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2002)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