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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신선 시인 / 물도 때로는 불길이다
서울 아파트 거실서 지내던 난 화분들을 시골집으로 데려와 마당에 내놓는다. 어리둥절 며칠 뒤 난 잎에 거뭇거뭇 흑반이 끼기 시작한다. 하나둘 예외가 없다. 긴 잎은 가운데가 갈라지고 이내 잎끝부터 마른다. 결국 실내에서 컸던 난 잎들 모두 말라 떨어진다. 지난날 강직함을 털썩털썩 내려놓는다. 자디잔 난석 틈에는 새 촉들이 솟는다. 품새의 크기와 색깔을 바꿔 밀어 올린 저 민낯들 낯선 바람과 햇볕에 근성 바꿔 어울리는 단순 적응인가 방어인가 머잖아 죽을 자리 잡는 짐승인 듯 여기 으늑한 산골 마을을 골라 나는 왔다. 귀촌은 도연명(陶淵明)이 원조지만 이 구석진 동네 아무개로 와 새참에 몇 잔 털어 넣는 막소주가 허기진 내 내벽에 홧홧한 불길로 치붙어 오르는데 저는 무엇에 허기졌는가 자질한 고랑물이 터앝의 두둑마다 흙을 머금고 위로 위로 치솟는 걸 본다. 보고 있으면 꼭 절정까지 솟구치는 불길이다. 퇴경(退京) 전 달래고 쓰다듬던 서울을 내려놓고 적응인지 방어인지 본색을 바꿔 가며 이즘 나도 새 촉들을 절정까지 푸른 불길들로 밀어 올린다.
홍신선 시인 / 먼 길
때 없이 시간이 기어 오르내린 벚나무 아름드리 둥치엔 겉껍질 틈새 실낱의 고샅길이 나 있다. 그 길로 올해도 긴적없이 왔다 가는 봄 한철 이제 나도 하직하련다. 바람 없어도 때 없이 낙하하는 저 사창고개 줄지어 선 벚나무 떼구름 꽃들 속 꽃 진 자리가 더 큰 허공에게 자리 내주는 그 숨어 있는 자드락길로 내 가련다. 이 세상 너머 더 환한 세상 없어도 더러는 길 잘못 들어 옛날이 고스란히 살고 있는 과민소국 어느 낡은 집 걸쇠 따고 들어가 유폐될지라도 더러는 잘못 든 길 되짚어 나와 다시 남부여대 지고 이고 가는 유목의 뭇 마방들 뒤따라 황천의 천산북로 머나먼 길 헤맬지라도, 벚나무 떼구름들 속 내려가는 이 봄 한철의 하직 길 아파트 후문 근처 맥줏집에서 수입 맥주 한 병 입매나 하고 나도 긴적없이 휘적휘적 가련다. 앞서간 치들의 발자국 환할 일은 없지만 누구나 하늘에는 자기 길이 따로 있어 그 길 오고 갈 마련이다.
홍신선 시인 / 아, 그 나라
그 나라는 맹골수로에 전복되기 직전 직각 벽으로 기울던 대형 여객선처럼
이른바 난파 직전 고관, 졸부들, 정치꾼, 얼치기 기자들이 혹은 변복으로 혹은 팬티 차림으로 제일 먼저 빠져나와 도망갔다고 한다.
갑판 밑 선실 방방마다 구명조끼도 못 입은 채 대기하다 가라앉은 영문 모른 뭇 목숨들 머리 좋은 몇몇이나 몰살 중에 살아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격류 흐르는 서남단 심층류에 금세기 초 깊이 가라앉은, 거기 켜켜이 썩은 탐욕과 비리 속에 생금(生金)처럼 묻힌 그 어리디어린 미래가 이 시 읽는 당신이 아, 바로 그 나라다.
홍신선 시인 / 생활
A4 용지에 이즘 생활이 전폭 텅 비어 있다.
거기 나를 무릎 꿇려 앉히고 나는 서산대로 짚어 가며 나에게 허무경(經)을 읽힌다. 하루 한 차례씩이다.
진동 모드의 핸드폰이 진저리 쳤나, 그러나 막상 폴더 열면 텅 빈 액정 화면만 빠끔 내다볼 뿐 어디서고 후일담은 오지 않는다.
낮잠 막바지 좌심방의 어디선가 쾅, 쾅, 앞날이 무섭게 닫힌다. 아무리 귓속을 열고 털어 내도 생활은 쏟아지지 않는다.
싱크대에서 쌀 대껴 저녁 밥물 붓고 가늠하느라 담근 손등에 찰랑대는 후반생의 고요.
이때쯤 A4 용지에서 끓던 신경이 눌어붙는다. 다시 전폭 텅 비워진다.
홍신선 시인 / 단비
그만해라 그만하면 됐다 함부로 나대지 말고 그만해라
내리는 함박눈이 호두나무 고목의 어깨를 찍어 누르듯 어루만지고 품 안에 가로세로 두서없이 누운 논밭들을 더 깊숙이 안아 뉘는 소리. 내리는 솜눈들이 매무새 사납게 풀어헤치고 나대던 언덕 뒤 억새들도 제자리 붙들어 앉히는 소리. 궁둥짝 들썩이던 온 세상 뭇 것들 그렇게 제 자신 내면으로 내려가 들앉는데 뜨끈한 방 아랫목처럼 들앉아 혼자서 여럿이서 끼리끼리 귀 열고 수군대는 소리. 거기 대란 대치의 식식대며 들끓던 내 젊은 날 피도, 그만해라 참어라 아프기만 한 내 뉘우침도 다독여 주저앉히는 소리. 허공과 면벽한 애소나무들 누구처럼 제 팔뚝 끊어 내는지 눈발 선 산속 가득한 신음 소리. 즉설법문인가. 내 마음속 소리 죽여 듣는 함박눈 소리.
그만해라 그만하면 됐지. 함부로 나대지 말고 그만해라
홍신선 시인 / 뭘 허공에 쓰나
1
허공을 빗돌 삼아 앞에 뉘어 놓고 그가 새기고 써 내려가고자 한 최상승의 글 한 줄은 무엇인가.
변두리 없으니 한복판이 없고 내가 없으니 네 또한 없고 늙음 없으니 젊음이 없고 낡음이 없으니 새로움은 어디 있는가 깊음이 없으니 얕음은 어디 있는가
어리석어라 이미 누군가 허공을 그냥 저리 한 개 마음으로 써 놓았으니 무엇을 더 거기 새길 일인가.
2
마을 회관 앞 느릅나무 잎눈이 공중에 겨우내 피 듬뿍 찍은 붓끝을 중봉(中鋒)으로 쥐고 섰다 가끔 붓방아를 찧는다
뭘 허공에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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