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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시인 / 게발선인장
게 요리 전문 식당 앞을 지나다 수북이 쌓인 꽃게의 등딱지를 본다
쓰레기통 속으로 치워지기를 기다리는 선홍색 무더기 속에는 집게발 끝으로 허공을 찢어낸 게발선인장 분盆이 풍성한 꽃 무덤 쌓고 있다
점점이 붉은 꽃 게우고 있는 허공 속 길 따라 파도치는 푸른 스커트 속에서도 집게발 한 쌍이 기어나온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토르소가 된 앨리슨 래퍼*와 어린 아들이 트랩을 내려서고 있었던 것인데 기우뚱거리는 그녀를 지탱하는 건 짧고 뭉툭한 두 발뿐이지만 게걸음 마다않고 당당하게 제 몸을 이끌고 있다
흔들리는 생을 잡아줄 손, 그 손을 이끌어 줄 팔 하나 없이 탯줄 하나 달랑 매단 불구의 몸을 빚어 트래펄가 광장의 조각상으로 우뚝 선 그녀,
바람과 햇빛으로 채워진 제 안의 슬픔 넘어 또다른 세상까지 품을 줄 아는 눈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일까
파 먹힌 시간 속에서 와디 한줄기 흐르지 않는 사막과 물결치는 바다를 지나온 집게발 끝 속이 꽉 찬 꽃게처럼
뭉텅뭉텅 쏟아낸 꽃 무덤이 붉다 눈부신 통점이다
*앨리슨 레퍼: 선천성 질병인 단지증(短指症) 때문에 팔 없이 아기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 빈의 월드어워드 운영위는 올해 ‘세계 여성상’(Women’s World Awards) ‘성취’ 부문 수상자로 날 때부터 두 팔이 없어 입과 발로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어온 예술가인 그녀를 선정했다. 22세 때 첫 결혼에 실패했던 그는 그 후 미혼모가 되어 아기를 낳았다.
강영은 시인 / 호박
9월의 숲속 길을 간다 쓰러진 나무둥치 위로 싱싱하게 뻗는 넝쿨들 발목에 감기어드는 그것들을 어머니의 자궁 속,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몸의 탯줄이라 말하고 싶다 내 눈을 뚫고 들어오는 푸름이 하도 깊어 까마득히 잊었던 胎의 길로 직행하는 기억들 어머니의 밑동을 찢고 나오던 그날의 울음도 저렇듯 시퍼랬으니 내 울음의 뿌리가 항용, 미지를 향한 두려움 탓만은 아닌 태어나지 않은 나와 태어난 나의 간극에서 자란 둥근 열매의 전언이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이름을 잊은 채 산정에 묵고 있는 저 오래된 말들도 제 몸의 바깥을 향해 제 그림자를 내비친 적이 있었다 지상의 모든 길을 끌어안은 생의 둘레를 감싸며 둥근 길을 가고 있는 그 빈집은 밤마다 제 몸을 끌고 무량한 별빛에 닿고 있을까 9월의 하루를 몸에 지닌 채 이생의 문지방을 넘어가는 바람들 소멸과 만나는 일이 두렵지 않은 길고 긴 날의 저녁이 진통을 끝내면 금빛 햇살의 씨앗을 물고 언덕 너머로 사라진 새들처럼 나는, 한 덩이 붉은 노을을 순산할지 모른다
강영은 시인 / 모자(帽子)
겨울 햇빛이 앉았다 간 자리, 너덜너덜 헤어져 더이상 꿰맬 자리조차 없는 그림자 하나 오래 남았다 간 자리에 매발톱꽃은 발톱을 숨긴 지 오래, 상사화는 상사병에 걸린 지 오래, 머위 잎은 찢어진 우산이 된 지 오래,
탑골공원 벤치에 중절모 한 분 앉아 있다 실밥이 다 떨어진 낡은 코트 자락과 때 묻은 구두를 벗고 앉아 있던 기억마저 지우고
리폼 안 되는 아버지, 아버지 한분이 쓸쓸한 관 하나로 오래오래 남아 있다
강영은 시인 / 오래 남는 눈
뒤꼍이 없었다면, 돌담을 뛰어넘는 사춘기가 없었으리라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쓸어안은 채 쪼그리고 앉아 우는 어린 내가 없었으리라 맵찬 종아리로 서성이는 그 소리를 붙들어 맬 대나무 숲이 없었으리라 어린 시누대, 싸락싸락 눈발 듣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살금살금 대숲까지 내려온 뒷산이 없었으리라 눈꽃 피어내는 나무처럼 눈뜨는 푸른 밤이 없었으리라 아마도 나는 그늘을 갖지 못했으리라 한 남자의 뒤꼍이 되는 서늘하고 깊은 그늘까지 사랑하지 못했으리라 제 몸의 어둠을 미는 저녁의 뒷모습을 보지 못했으리라
온종일 퍼붓는 눈 속에 눈사람이 되어버린 봄이 와도 녹지 않는 첫사랑처럼 오래도록 남는 눈이 있다는 것은 더욱 알지 못했으리라 내 마음 속 뒤꼍은 더더욱 알지 못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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