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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연 시인 / 겨우살이
동지섣달
어머니 산후조리하던 날 진종일 불어대던 바람이 사라졌다 한기가 뼈 속으로 스며드는 밤
비릿한 홑치마 차림으로 굴참나무에 매달린 어머니
옥양목 적삼에 뜬 달의 눈 속에서 회오리치는 바람
달이 옥양목 적삼을 움켜쥔다.
현상연 시인 / 장폐색증
변기는 수시로 막혀 악취와 통증을 동반한 날이 많다 기계를 들이대고 관장약을 쏟아 부으면 간헐적으로 틈이 보인다 그러다 다시 막힌다 퇴석층을 이룬 오물이 역류 한다 그때마다 몸에 갇혀 있던 냄새가 탈출을 시도 한다 미생물이 들어 앉아 부패한 스트레스와 여름에도 얼어있는 수챗구멍의 병마, 그것들이 몸을 서서히 막고 있는 어둡고 답답한 일상 속의 하수구를 짐작해본다
내려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소통 불능인 그 곳, 통로 어느 한 곳이 흐르는 걸 막아 폐색의 단층을 이룬 것은 하구 경계를 게을리 한 탓이다 하수구나 장이 막힌다는 것은 마지막 한계에 도달한 낡은 배관의 반란이다
허리가 휘도록 통증이 혈을 막고 길은 열리지 않는다 건너편에선 아랫도리 터널 뚫는 공사가 한창이다 또 다시 대장이 막히고 있다.
현상연 시인 / 호박고지
참선 중이던 누런 호박이 몸을 연다 씨앗이 눈부시게 환하다 엄마 안에서 엄마를 훔치고 다음 생애를 틔울 씨앗들, 후생이란 저처럼 이승의 환한 빛마저 닫고서 또 다른 봄을 기약하는 것 참선에 깃들여 지는 것들은 담장 위에서도 윤회를 훔치고 있다 나 또한 어머니 후생이기는 저 호박의 씨앗과도 같다 한 세계가 무르익을수록 더욱 공평하게 여며야 하는 이승과의 인연은 저울처럼 정직한 날들은 아니었다 한 여름 작열하는 태양 아래 스스로를 묶어 참선에 드는 일이 그러했고 묵묵히 참아내던 내 인내심이 그러했을 것이다 열었던 몸을 조용히 닫는 찰나에 햇빛이 잠시 머물다 가고 육신을 해탈하는 엄마의 생에 뽀얀 진액이 내려앉는다.
현상연 시인 / 휴대폰 중독
전철 안이나 거리 사람들, 모두 손 전화에 감염돼 있어요
좀비가 휴대폰 피를 빨고 있어요 손전화가 없으면 불안이 진도6까지 올라가요 음란성 광고, 매화 향기는 시체예요 배터리가 죽었어요 충전은 바이러스예요 푸른 핏줄이 돋아나는 액정 시체가 일어서고 멜론의 으스스한 음악이 흘러요 어디선가 눈감은 목소리가 들려요 액정 속엔 유령이 돌아다녀요
거리에 좀비들이 우글거려요 휴대폰은 한 눈 파는 운전자가 무서워요 전봇대도 눈감은 핸드폰과 부딪친 적 있어요
저기 또 좀비가 걸어오고 있어요 매화꽃과 교신중이네요 남쪽은 온통 꽃향기 중독이라지요 그 쪽 중독은 일시적인 거래요.
-{애지}, 2018년 봄호에서
현상연 시인 / 태풍
부락산 중턱에 젊은 나무 하나 계곡을 가로질러 누워 있다 목숨은 생생하게 붙어 있지만 조금씩 말라붙는 속내를 모르는 햇빛만이 그 안을 기웃거린다 연신, 뿌리가 깨져 이리저리 갈팡질팡하는 수액들 혼란이라도 쥐어짜듯 저녁의 끝자락까지 그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천천히 갈증의 내부로부터 게워 나오는 지난 한때 태풍의 찌꺼기들 그랬었구나 세상의 모든 나무들은 지상에 누워서야 바람의 견적을 뽑는구나 조용히 계곡을 내려놓고 도시 속 아직도 수런거림이 그치지 않는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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