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천향미 시인 / 바다빛에 물들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7.

천향미 시인 / 바다빛에 물들기

 

 

  독수공방,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이라고 기도하다 말고 내 안에 중심이 없는 것 같아, 중심의 시원 태초의 뼈를 찾아 바다 간다 바다의 외곽에 눈을 얹는다 게으른 수평선이 끌고 오는 원시의 햇살, 살이 도처에 널려 있다 뼈 없는 살이 저렇듯 눈부시게 반짝일 수 있다니!

 

  혈혈단신, 황홀한 빛은 뼈로 되어 있다 중심을 고집하지 않는 저 바다의 등 뼈, 태초에 나도 물이었을 적, 물의 변방이었을 적, 그리하여 중심을 향해 끝없이 휩쓸렸을 내 뼈들

 

  무원고립, 뼈들이 돌연 한 몸을 이루는 에스겔 골짜기의 환상을 보듯, 저 빛나는 무의식의 파장 속에서 나 그윽이 퍼질러 앉아 생면부지의 몸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뼈를 세운다 물이 몸이 되고, 빛이 뼈의 모체가 되는 날을 축복하는 지금 해운대바다는 갈매기 춤사위가 중심이다.

 

2009년 계간『신생』봄호

 

 


 

 

천향미 시인 / 난시(亂視)

 

 

  나, 나비 한 마리 부화시켰지 타오르는 햇살 속 냉이 꽃처럼 가슴 달끈 태웠지 흔들리는 ‘틈’으로 집을 지었지 화끈 거렸지 바보라고 친구들이 놀려댔지 집을 지을 때마다 젖꼭지가 화끈거렸지 밤을 기다리는 나비의 날갯짓에 공동묘지로 소풍 갔지 무덤에선 골똘한 향기가 산발한 치자꽃처럼 피어올랐지 내가 낳은 나비의 흐릿한 동공, 안과에서도 치유 불가 진단이 나왔지 쿵쿵 가슴이 뛰다가 불면의 밤이 연속되다가 급기야 초점 잃은 눈동자를 내다버렸지

 

  낭랑18세 펄럭이는 극세사 이불 홑청의 눈부신 감촉 까닭모를 눈물 흘리던 때도 그랬었지 나비의 선명한 날갯짓 그리움의 창문을 열었다가 느닷없이 달려드는 서러움에 아린 눈만 서러웠지 안면 발열이 황사처럼 당신을 몰아칠 때 눈부처 저도 흔들리고 싶었던지 물무늬 한 방울 눈물로 매달았다가 소실점으로 떨어트렸지 나, 이제 한 남자의 폐경을 보고 있지 슬픈 지구의 눈물을 보고 있지.

 

2009년 계간『신생』봄호

 

 


 

 

천향미 시인 / 봄은 진정 여우로다*

 

 

구두코 반질거림 속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우 한 마리 눈 반짝이고 있다

 

온 몸으로 전해져 오는 저 관능

캉가루표 구두약 역한 냄새쯤이야 가볍게 잊어주지

꼬리 살랑살랑 흔들며 곡예 하는 욕망

꽃처럼 삼키고 나면

 

“이 구두신고 나만 생각하라.”던

하이힐 뒤축에 밟히는 묵은 봄

돌연 공중으로 훌쩍 뛰어올라

물오른 목련 꽃망울로 맺힌다

 

팔랑대는 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꽃 중심 흔들어대며 날아가는 나비 한 마리

구두코를 사뿐히 스쳐지나 어디론가 날아간다

 

꽃눈 찡긋해 보이며 웃자라는 개나리 여심女心

부푸는 봄날엔

유혹 아닌 것 없다

 

*이장희님의 시 제목<봄은 고양이로다>를 패러디 함

 

계간 『천년의시작』2009년 봄 호

 

 


 

 

천향미 시인 / 동해남부선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역방향 창가에 앉아

내 유년에 개가한 엄마의 철길위로

엄마, 하고 나직이 불러본다

입김어린 차창에 언니 ‘태희’이름을 먼저 쓰고

차창이 흐려지기를 기다렸다 다시

‘미야’ 작은 글씨로 내 이름을 적었을,

그리고는 이내 뿌옇게 지워졌을,

왜, 과거는 멀미가 날까? 역방향 좌석처럼

엄마가 떠나던 그날 지축을 흔들며

기차는 미포 구덕포를 돌아 북으로 갔고

서러움에 울던 레일의 평행선은

다음 기차가 지나간 후에라야 아닌듯

지워졌을 것인데

늘 안개 속을 달려야만 했던 기차

등 돌리고 앉은 나처럼

등 뒤의 풍경이 그리워 더욱 애틋하였을

애틋하여 서러웠을 시간을 만나러 간다

풀어내는 기적소리에

온기를 느끼며 쉬고 싶은 간이역

다음 역은 월례역이다

애써 ‘원래’라고 발음하며 원래 그랬던 것처럼

내 잃어버렸던 여정의 출발점을 만나면

그때 기적보다 크게 울 수 있을까?

동해남부선 열차는 파도가 바퀴다

용서 같은 파도가 잠잠해지면

나 거꾸로 앉았던 자리 앞으로 앉을 것이다

 

<부산을 쓴다> 장소사랑 시(topophilia poems) 부산작가회의 사화집

 

 


 

 

천향미 시인 / 롤러코스터

 

 

  우리의 십이월은 햇살이 두텁다 추위의 볼륨을 높이자 방음벽을 뚫고 겨울 숲이 전송된다 우리는 눈송이를 밟으며 달빛을 다진다 너무 많은 웃음을 소모한다 우발적 키스를 남발하는 입술이 떨린다 귓불에 매달리는 목소리는 익숙해질수록 낯설다 비명이 쏟아지는 입술에 지퍼를 채운다 나선형의 궤도를 돌아나오는 시뮬레이션게임 탈골된 어깨에서 뼈마디 부딪는 소리가 들린다 서둘러 실핏줄을 갈아 끼우고 날개를 입힌다 가장 낮은 폐허를 견딘 지상의 입들이 말문을 트기 시작한다 어둠을 지탱하던 별들이 이유없이 흔들린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풍문이 배달된다 접경을 지나자 호명되지 못한 낯선 풍경들이 길을 막아선다 엑스자가 그려진 팻말의 경계를 넘어서자 분류되지 않은 계절이 즐비하다 우리는 낙차를 즐기며 공중회전을 계속한다

 

『서시』2009 겨을호

 

 


 

 

천향미 시인

1965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2007년 계간 《서시》를 통해 등단. 2011년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당선. 현재 『시와 미학』 사무국장으로 활동 中. 시집으로 『바다빛에 물들기』, 『깡이 있어야 날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