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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금은돌 시인 / 나사를 위한 4개의 즉흥곡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8.

금은돌 시인 / 나사를 위한 4개의 즉흥곡

 

 

제1번

 

 뇌에 나사를 뚫는 일

구멍에 물을 주는 일

 

(중략)

 

한 달 전, 이런 시를 썼다.

제목은 ?근로기준법?이다.

 

**********

 

‘뇌에나사를뚫는일’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뇌에나사를뚫는일’을 실행하려고 이 문장을 다시 쓴다.

 

‘뇌에나사를뚫는일’이라는 문장을 따라 뇌에 못을

박아본다. 아프다. 뇌를 왼손에 들고 써본다.

‘뇌에나사를뚫는일’이라는 행위를 책상 위로 옮긴다.

뇌에 나사가 박히지 않으니, ‘뇌에 구멍을 뚫는 일’이라고 고쳐 쓴다.

 

나는 ‘뇌에나사를뚫는일’을 수행했던 나를 기록한다.

 

‘뇌에나사를뚫는일’이라는 문장에서 나사가 일어선다. 나사가 까치발을 든다. 작은따옴표 안에 있던 나사가 바깥으로 점프하려고 한다. 나사가 작은따옴표 울타리를 넘어가려다 넘어진다.

 

나사 빠진 뇌

나사 박힌 책상

 

‘뇌에 구멍을 뚫는 일’이라는 문장이 남는다.

 

제2번

 

 ‘나사빠진뇌’가 8시간 노동을 한다.

 

‘나사박힌책상’이 8시간 동안 미소를 띠고 행정문서를 작성하고 밥을 먹고 조직이 명령하는 똥을 눈다. ‘나사빠진뇌’가 ‘나사박힌책상’ 위에서 타이핑한다.

 

오늘을 잃은 나사

오늘을 앓는 뇌

 

밥을 먹는 나사

비계에 싸이는 뇌

 

나사빠진뇌가 퇴근을 한다. 나사빠진뇌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본다. 나사빠진뇌가 전자레인지를 돌린다. 뇌가 식었던 피자를 먹는다. 뇌가 자위를 한다. 뇌가 뇌 없이 잔다. 뇌가 뼈 없이 잔다. 뇌는 눈을 감지 않는다.

 

나사박힌책상이 저물도록 퇴근하지 않는다. 나사박힌책상이 컴퓨터 밑에 있다. 나사박힌책상 위에 사무전화기가 놓여있다. 책상 위에 달력이 있다. 책상 위에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책상은 사건을 일으키지 않는다.  

 

제3번

 

나사가

새벽에 일어난다.

 

나사가 통통 튄다.

 

무엇을 뚫을까 한다.

무엇을 조일까 본다.

 

한 달 전의 '근로기준법' 앞으로 간다.

 

먼저

 

‘뇌에나사를뚫는일’과 그 뒤에 따라온 ‘뇌에구멍을뚫는일’이라는 문장을 해체한다.

 

다시 박는다. 돌린다.

 

회사원의 무의식에 구멍을 내고

그 속에 물을 준다.

 

문장이 떠다닌다. 흩어진다.

 

    뇌……     구름……      신경계……

 

                     척수……     물고기……      해마……

 

                        비……

 

나사가 중얼거린다.

 

지문인식기에 출근을 확인하는 터치를 하고, 첫 번째 인사한 직원의 얼굴을 바라본다. 저 직원의 머리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뇌에구멍을뚫는일’이라는 문장을 모자 속에 숨긴다. (나사가 박힐까?)

 

모자에 들어간 '뇌에구멍을뚫는일'이 밥을 먹을 때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쓸려 내려올 때 같이 쏟아지려 했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모자를 꾹, 눌러 쓴다.

 

누구를 뚫을까?

두 번째 인사한 직원의 얼굴을 바라본다. (구멍이 뚫릴까?)

사장과 전무의 얼굴을 올려 본다.

 

한 달 전에도 모르고 한 달 후에도 모를 주문을 외운다. 회의에 참석한 직원들 사이로 나사가 일어선다.

 

모자를 벗는다. 서류봉투에 담아 온

 

나사가 떨어진다.

 

대표이사가 고개를 떨어뜨린다. 과장이 책상 아래로 고개를 숙인다. 차장이 의자 다리 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9급이 무릎을 꿇고 나사를 주우려고 한다.

 

대표이사의 뇌, 과장의 뇌, 차장의 뇌, 4급의 뇌, 7급의 뇌, 9급의 뇌가

쏟아진다.

 

뇌의 지도가 펼쳐진다.

 

“여기서 우리, 뭐 하고 있지?”

 

제4번

 

뇌에 구멍을 뚫고, 다른 뇌를 찾는다.

대표이사의 뇌에 9급의 뇌를, 차장의 뇌에 4급의 뇌를

돌려 박는다.

 

대표이사가 여자 목소리로 말한다. 과장이 남자 목소리로 말한다. 차장이 4급 목소리로 말한다. 9급이 대표이사 목소리로 말한다. 중심으로 갈수록 말이 많다. 대표이사가 된 9급이 명령한다.

 

“내일부터 모두 유급휴가야.”

 

대표이사가 된 9급이 직원을 데리고 휴가를 떠난다. NASA 무인우주 왕복선을 탄다. 우주정거장에 착륙한다. 돌아가지 않는다.

 

 


 

 

금은돌 시인 / 라

 

 

 해발고도가 높아질수록 고막은 바늘에 찔린다    모든 일이 일어났지만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의자를 향해 걸어가듯이,  사랑

 겹쳐진 스푼처럼

 라

포크에 찔린 팬케이크처럼

해안선의 파도가 입술 안에 넘실거리도록 달려라 달려라, 입천장이 찢어지도록

양팔을 벌려

룰루랄라 아이를 낳는 것처럼 존중을 담아

노을에 비친 속눈썹 돌 위에 올려두어

어린 라마승의 독경 소리가 언덕에서 울려 퍼지도록

절망은 꽤 쓸만한 것이라면서, 뒤꿈치 세우고 구름 위에 침묵을 올려두고

라ㅡ

문을 열지 않았는데, 문을 열었다고 착각하는 이들을 위하여

숨이 멎을 때일지라도 라?

눈에서 양파 냄새가 날지라도 라?

사건이 느려지도록 라?

태양 아래서 라?

태양의 목을 베고 라?

고독한 바위가 되리라

 

 


 

 

금은돌 시인 / 온

 

 

‘기대다’라는 말은 기울어지다가 아니다

이 말은 흠뻑 빠지다의 다른 말자유롭게 무너지다와 같은 말

나를 무너지게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이

기대는 연습이 되어있지 않기에쉽게 쉽게 허물어지지

그대의 어깨에 기대지 않고도 기대는 방법은 당신의 안부를 아는 것

ON 상태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축복 받은 일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

그대의 짧은 호흡이 돌고 돌아아파트를 끼고 고속도로를 달리고들판을 가로질러 이곳에 도착하지 못하더라도

‘기대다’라는 언어를 바람에 얹어 실려 보낼 수 있으니,

우리는 사실 모두가 조금씩 그렇게 기대어 왔던 갈잎들

 

 


 

금은돌 시인

(본명: 김은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학부 및 석박사과정 졸업. 기형도 연구로 박사 학위. 2008년 《애지》에서 문학평론이, 2013년 《현대시학》에서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연구서로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국학자료원)가 있음. 현재 중앙대학교 강사. 문학평론가이자 화가, 교수 등 다양한 활동. 2020년 4월 15일 지병으로 별세(향년 5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