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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고음 시인 / 4 O'clock Flower―분꽃처럼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8.

나고음 시인 / 4 O'clock Flower―분꽃처럼

 

 

오후 4시의 약속처럼

작은 도자기 안에서 분꽃이 피어난다

 

분꽃 핀 동네는 어디나 고향 같다

우물가 장독대 옆 꽃밭에서

작은 등불 같은 몸을 세워 마당을 밝히던

언제나 내 안에서 웃고 있는 꽃

 

누렇고 검은 얼굴의 도자기 두 점

평평하고 주름 잡힌 검버섯 핀 얼굴

오후 4시가 되면

분꽃 향내 속에 피어난다

 

모양도 색도

어느 것 하나 탐낼 것 없는 지난날들이

분꽃처럼 피어난다

 

 


 

 

나고음 시인 / 마음 갤러리

 

 

숲속, 채색된 마음의 그림을 본다

 

달콤한 샤갈의 키스가 있고 음울한 뭉크의 소리 없는 절규가 있는,

그 속에서 폭포를 향해 다발 째 떨어지는 꽃도 보고

폭포의 물보라가 만들어내는 눈부신 무지개도 본다

 

앵그르에서 잭슨폴록의 뜨거운 추상화까지 다 자라던

푸르고 깊은 나의 숲

어떤 고요에도 머무르지 않는 살아있는 색채를 얻기 위해

나를 스치고 나를 통과하며 숲속을 걸었다

 

숲에서 치유하지 못할 슬픔은 없다고 하지만

 

나의 숲엔 알지 못하는 슬픔이 자란다

때로는 한꺼번에 몰려서 올라온다

 

열린 창으로 40대와 50대의 내가 들락날락

서로 불을 지르고

불을 끈다

 

불똥 튀는 그림을 지운다

마음을 지운다

 

 


 

 

나고음 시인 / 느린 우체통

 

 

1년 후 배달된다는

하얀 인조석 탑 모양의 우체통

 

빠르게 변해 가는 세상 한 모퉁이를 지키는

반가운 느림보 앞에서

느린 박동으로 가슴 밑바닥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풍경을 따라가다 미처 읽지 못한 자막, 눈길 멈춘 그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독백

 

만세루 추녀가 편안한 걸음으로

우체통을 감싸 안고 있는 어스름

꽃이라도 활짝 필 것이지

아쉬운 동백은 어찌 이리 늦게 눈을 뜨는가

부치지 못한 편지가 마음 한 페이지를 열게 하는

선운사 느린 우체통 앞에서

느린 걸음으로 오고 있는 당신을 접어

돌탑 우체통에 넣는다

 

동백이 반쯤 입을 벌린 선운사 대웅전 앞

만세루 마당 한쪽에 다소곳이 서 있는

느린 우체통

 

 


 

 

나고음 시인 / 바다가 젖는다

 

 

살아있는 장봉도 뻘밭

갯벌을 다둑다둑 덮던 검은 손 지나간 뒤

비까지 거들어

바다는 어느새 만조

슬픔도 만조

 

바람을 타고 후두두 비 떨어진다

꽃잎도 떨어진다

더 붙잡아 두려던 골똘한 생각

느슨해진 끈을 타고 후두두 떨어져

그만 비가 된다

 

비가 갯벌에 하염없이 빠지고 있다

내가 버린 슬픔

내가 버린 꽃잎들 서로 엉겨

비의 발목을 붙잡고

 

뻘밭의 검은 눈물

바다는 하염없이 씻어

비의 집으로 보내고 있다

 

 


 

 

나고음 시인 / 5×10 규칙을 아시나요?

 

 

5㎝×10㎝ 간격 미만으로 점을 찍거나 선을 표시하면 새들은 자신이 지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건물 유리창과 방음벽을 피하여 날아간다

 

 

800만 마리의 새를 삼키는 투명한 죽음의 심연

 

바람을 젓는 날개는 그저 투명한 하늘이 좋았는데

두꺼운 유리벽 속 짙은 커피 향을 통과하지 못하고

구름 잡던 손을 놓아 버렸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는 post boomer들

새들의 죽음엔 관심이 없어

슬프지 않았다

웃고 있는 대형 액자 속 사진만

하늘 밖으로 간 그들의 마지막을 보고 있었다

 

날기 위해 뼛속까지 비운 그들의

메꽃 같은 여린 날개가 안쓰러운

선량한 손들

점을 찍고 선을 긋는다

 

난반사로 눈을 잃은 새들을 위해

유리벽 안에서 날지 못하는 새들을 위해

 

 


 

 

나고음 시인 / 밤비, 대나무 악보

 

 

어둠이 출렁이는 서운암

밤의 모서리를 둥글게 깎으며 비가 내린다

 

나의 뿌리가 젖을 동안

비는 어둠 속에 서성이며

마을 건너 대숲으로 가지 않고

내 곁에 머문다

눈[眼] 안으로 온다

 

귀한 이 방

동안거 하시던 스님도 이 빗소리 들으셨을까

스님이 남긴 화두 한 자락 만날까 하여

대나무처럼 잠들지도 지치지도 않는 밤

 

젖은 오늘

밤비 소리

대나무 악보로 적는다

 

 


 

나고음 시인

경남 마산에서 출생. 서울교육대학교 졸업,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졸업. 2002 《미네르바》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불꽃가마』『저, 끌림』과  미술저서 『유아미술교육학』, 『마음을 여는 미술활동』공저와 에세이 『26&62』, 동시 『사이사이 동시집』 편저가 있음. 2015년 서울시문학상 수상. 숲속의 시인상, 제11회 바움작품상, 한국시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