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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위상진 시인 / 물렁물렁한 방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8.

위상진 시인 / 물렁물렁한 방

 

 

해가 들지 않는 방이 있다

해질녘 잠깐 문 앞까지 빛이 왔다 가기도 한다

방문 앞에는 보이지 않는 금줄이 쳐져 있는 듯

쉽게 다가갈 수도 없다

 

태아처럼 손가락을 빨며 너는 방에 담겨 있다

그때 스탠드 불은 펼쳐진 책을 더듬어 보기도 했을까

 

 63빌딩 전시실, 이집트에서 온 람세스 2세는 삼천이백육십 년 째 자고 있다 북쪽으로 문을 낸 피라미드처럼 검고 깊은 방, 다시 깨어나기 위해 외우는 사자의 서, 관 속에서도 왕은 파피루스에 인장을 찍고 있겠지 람세스의 심장은 방부제로 가벼워져 있고 신이 되고 싶었던 시간은 물렁물렁해져 있다 왕은 그 시간에 울기도 했으리라 람세스의 가슴에 붙어있던 쇠똥구리는 날개를 버리고 날아오르는 중일까?

 

저물녘, 조금 늙어버린 너는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은 머리맡에 구겨져 있고

너의 몸에서는 비늘이 떨어져 내렸다

멈춰버린 시계를 더듬으며

너는 혼자 중얼거렸다

 

창 밖에는 황사가 내리는지

마스크를 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걸어다녔다

초저녁 먼지 냄새는 굴목으로 번지고

길은 두루마리처럼 말리며 그림자를 삼켰다

 

너는 블라인드를 내린다

방은 다시 피라미드처럼 그윽해진다

 

 


 

 

위상진 시인 / 방향감각이 없으니

 

 

참 딱한 일인 게, 나는 방향감각이 없다.

길 떠날 일 생기면 일단 걱정이다.

아드은 출발해서, 도착 때까지 전화로 길 안내를 해.

거기다 남편까지, 나 같은 사람 어디 인신매매단에라도

끌려가면 길 몰라 도망치는 일도 쉽진 않을 거란다.

아들은 이미 서너 살 때부터 눈치 챈 일이다.

“엄마 이리 가는 것 맞아?” 다짐에 다짐,

어쩌다 남의 차라도 타면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 되지요?”

등줄기 땀이 나면서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다.

 

살아가는 일도 그랬다.

어리둥절, 허둥대고만 있다.

늘 나는…

 

 


 

 

위상진 시인 / 무성의 입술

 

 

석고상은 붉은 입술로

일렁거리는 말을 한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아무 말이나 좀’

 

잠에서 깨어나자

그는 링거줄을 뽑아 던진다

회색 피가 흘러나오는 제라늄 화분

그는 입술을 더듬어 본다

‘좋은 말을 해본지가 오래 되었어’

 

낮에도 밤은 여러 번 찾아왔고

휘어지는 길을 따라 아침은 사라졌다

간호사들은 오늘 죽은 사람의

생일 케잌을 우물거린다

‘나는 내 맘에 들고 싶어’

 

밧줄에 묶인 채 거꾸로 올라가는 간판

창밖의 검은 태양은

바닷물 색을 울컥울컥 쏟아내고

간판이 있던 자리 공중에 걸린 둥지 하나

어린 새의 솜털이 묻어 있다

 

구름그림자를 덮어쓴 간판은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지않는다

‘내가 벗어둔 집에게 인사를 한 적이 없어’

 

그는 유리창 위에 입술을 벙긋거린다

한 단어 한 단어 말의 입김이 번진다

 

 


 

 

위상진 시인 / 세탁기에 대한 변명

 

 

누군가 자꾸 떠났던 것 같아

25시 빨래방

그의 잠과 꿈 사이 손가락을 집어넣는 코인

그의 이름보다 먼저 떠내려가는 꽃잎

지워지지 않는 기억형상이 소환되는 중이다

축축한 잠 속, 어긋난 지퍼에

맞물려 있는 위태로운 이념들

오염된 얼룩을 지우는 다른 방식을 찾지 못했어.

말을 잘 할 줄 모르는 그는

참 많은 말의

거품을 쏟아내야 했지.

주어는 왜 매번 달라지는 거죠?

네가 사라지면 그도 사라지거든.

틀릴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어.

헝클어진 머리칼의 집시 여자가 웅얼거렸지

 

침묵의 피를 흘리고 있는 코인

반복되는 변명은 더 이상 변명이 되지 못했지.

어쩌면 그는 그 자신에게 친구 배역을 했는지 몰라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진 유령은

마침내 물빨래한 양모처럼 줄어들고

해마에 기록된 빛과 그림자

누군가 떠나려 하고 있어.

언제나 처음인 듯

보이지 않는 국경선, 25시의 기항지에서

 

 


 

위상진 시인

대구에서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1993년 월간 《시문학》에 <吉印堂>외 5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햇살로 실뜨기』(시문학사, 2001), 『그믐달 마돈나』(지혜사랑, 2012)가 있음. 2007년 「푸른시학상」수상. 2016년 시문학상 수상.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2011.2019). 재)심산문학진흥회 사무국장. 사)국제pen한국본부 기획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