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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승강 시인 / 등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8.

김승강 시인 / 등

 

 

잠시 한 눈 파는 사이 소파에 앉은 채 까묵 잠이 든 당신

당신 죽은 건가요 안돼요 벌써 죽으면 안돼요

이렇게 죽으면 안돼죠 그 사이를 못 참고

용서 하세요 잠시 한 눈 판 걸 다시는 한 눈 팔지 않을게요

그런데 당신 숨을 쉬고 있군요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의 젖을 빤 뒤 곤히 잠든 아이처럼 새근새근 숨을 쉬고 있군요

죽은 게 아니었던가요 역시 그랬군요

내가 당신에게 등을 보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까묵 잠에 떨어졌다고요

스크린이 걷히듯 앞에 있던 큰 산이 스르르 사라졌군요

산이 사라지자 갑자기 아득해져 눈은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매었군요

혼자 죽음의 그림자를 본 짐승처럼 공포에 떨고 있었지요

정말 지평선 너머에서 나타난 검은 그림자를 보셨군요

먹구름처럼 덮쳐오는 검은 그림자

당신은 혼절하듯 잠에 떨어지고 말았지요

잠속에서도 한번씩 몸을 부르르 떠는 당신

미안해요 다시는 등을 보이지 않을게요

티브이에서 런닝맨 보셨죠

내가 당신에게 등을 보이면 내 등에 붙은 패드를 떼어버리세요

그러면 나는 죽게 됩니다 당신에게 등을 보이면 내가 죽는 거예요

죽어도 싼 죽음이죠 죽고 싶지 않아요 아픈 당신을 두고

그러니 다시는 당신에게 등을 보이지 않을게요

당신에게 목숨을 빼앗기기 않으려면 그래야겠지요

죽어도 당신 죽고 난 뒤에 죽을게요 당신의 죽음을 지켜보고 죽을게요

내 죽음은 누가 지켜줄지 모르지만요 그때를 생각하면 벌써 외롭고 쓸쓸해요

소파에 앉은 채 까묵 잠든 당신

앉은 채로 죽은 스님처럼

그러지 마세요 흉내내지 마세요

 

 


 

 

김승강 시인 / 선이 죽다

 

 

선의 장례식장을 나와

나는 선이 죽어가는 거리를 걷는다.

선은 선이 살아 있었다.

그래서 모두 가을처럼 슬퍼했다.

 

여인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을 하고 있다.

등줄기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은 완만한 둔부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그렇지만 그때뿐이다.

한때 선이 살아 있던 여인들이다.

나의 시선은 선이 살아 있는 여인을 쫓느라 분주하다.

 

선은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그러나, 공중에서 수직으로 급강하해

지상의 먹이를 낚아채 수직 상승하는 매;

선은 칼날 위에 산다.

선이 선을 감추고 있을 때가 살아 있는 동안 가장 아름다운 때다.

 

 


 

 

김승강 시인 / 키나(Kina)

 

 

  키나는 올해 여덟 살 계집아이 어느날 밖에서 돌아와 무작정 기타를 사달라고 졸랐네 식당일로 바쁜 아버지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기타를 사 주었지 키나의 기타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네 저 골목끝 어딘가 키나에게 기타를 가르쳐주는 스승이 있다고 아버지는 생각했지 학교에서 돌아오면 키나는 책가방을 내팽개치고 골목끝으로 사라졌네 해가 저물어 집으로 돌아와 켜는 키나의 기타소리는 한층 더 깊어져 있었지 자신의 몸보다 큰 기타를 안고 기타를 켜는 키나는 상처 입은 연인을 안은 성숙한 여인 같았지: 키나 너 어디서 기타를 배워오는 거니 키나는 대답 없이 빙그레 웃곤 했지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저 골목끝의 사내를: 키나에게 기타곡을 들려준 사내는 누구에게도 기타를 가르쳐 준 적이 없지 키나는 기타소리에 이끌려 제발로 찾아 갔지 키나는 그 기타소리를 듣고 스스로 기타를 익혔네 키나는 올해 여덟 살 계집아이 아무도 키나에게 기타를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키나의 기타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성장했네 자신보다 큰 기타를 안고 연주하고 있는 키나는 사랑에 빠진 성숙한 여인 같았지; 혹은 깊은 사랑의 상처를 안고 사는 쓸쓸한 여인 같았지 저 골목끝에는 한 사내가 살고 있지: 어느날 어디선가 바람처럼 스며들어온 한 사내가; 어느날 키나의 영혼 속으로 쑥 들어온 기타음률을 들려준 사내가; 전생에 키나의 헤어진 연인일지도 모르는 사내가 사랑이 뭔지도 이별이 뭔지도 모르는 여덟 살 계집아이 키나 하얀 도화지처럼 키나의 영혼은 순결하지 그래서 기타소리만 듣고도 어느날 문득 영혼을 울리는 기타음을 켤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기타를 켜지 않을 때 키나는 영락없는 여덟 살 귀여운 계집아이지

 

 


 

 

김승강 시인 / 카페 도로시

 

 

  도로시는 저러다 문닫지 옆집 미네는 손님들이 연신 들락거리는데 파리만 날리고 있으니: 북적거리는 미네에서 점심으로 냉면을 먹고 나오다 또 도로시로 눈이 가고 말았어 참 이상해 도로시 아가씨는 자꾸 유리창에 낙서만 하고 있으니 유리창이 온통 낙서장이 되어버렸어 개업할 때 보니까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있던데 요즘은 나오지도 않나봐 손님들이 한창 붐빌 점심시간에도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으니 손님이 없어 그런가 들락거리는 남자가 없는 걸로 봐서 이혼한 엄마와 딸인 것 같애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는 카페를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어보였고 딸은 너무 어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할 일이 없었던 모양이야 이혼위자료로 시작한 게 아닐까 위자료까지 날려버리면 저 모녀는 무얼 먹고 살지 대학가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해도 그렇지 카페는 늙지도 젊지도 않은 중년의 여자가 제격이야 첫사랑의 기억을 아직 간직하고 있을 것 같은 중년의 여자 나는 카페 주인이 꿈인 여자들을 몇 알지: (하루는 항상 똑 같이 시작되지) 출근하자마자 이프유고어웨이*로 시작되는 샹송음악 씨디를 튼다; 원두커피를 내린다; 밀대를 든다; 제라늄 화분에 물을 준다; 길고양이 먹이를 내놓는다; 커피를 들고 창가 의자에 앉는다; 커피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여성잡지를 뒤적인다; 간혹 잊고 있었다는 듯 창밖을 내다 본다 장사는 밑지지만 않으면 돼 소일거리가 있다는 게 중요하니까 통장에는 크게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돈은 들어있지 어쩌다 멋진 사내에게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 그러나 연애하고 싶은 정도로 마음에 쏙 드는 남자가 있어도 마음 뺏기는 것은 절대금물! 남자에게 마음을 홀딱 다 주어버리는 여자는 카페 주인 자격미달! 연애는 은밀히 하되 한 남자에게 마음을 다 주지 말 것! 그런데 도로시는 저러다 문닫지 파리만 날리고 유리창은 낙서만 늘어가고 있으니 도로시 아가씨는 첫사랑 딱지는 떼긴 뗀 걸까 혹시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엠비씨 수목 드라마 커피프린스를 보았던 건 아닐까 그때 윤은혜는 카페 유리창에 매직으로 예쁘고 앙증맞게 그림을 그리고는 했지 유리창이 메뉴판인 것처럼 내가 봐도 순수하고 멋졌지 도로시 아가씨는 카페 주인이 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려 카페는 유리창에 그림만 그럴싸하게 그린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 If you go away

 

 


 

김승강 시인

경남 마산에서 출생. 2003년 《문학ㆍ판》으로 등단. 시집으로 『흑백다방』과 『기타치는 노인처럼』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