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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신선 시인 / 가을 맨드라미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8.

홍신선 시인 / 가을 맨드라미

 

 

1

 

근본 한미한

선비는 다만 적막할 따름이다

 

이따금

무료를 간 보느니

 

2

 

긴 여름내

드높이 간두에 돋우었던 생각의 화염을

속으로 속으로만 낮춰 끄고 있노니

 

유배 나가듯

병마에 구참(久參)들 하나둘 자리 뜨는

텅 빈

가을날

 

_홍신선 『우연을 점 찍다』(360)에서

 

 


 

 

홍신선 시인 / 시월의 숲길에서

 

 

하늘은 긴 오후를 두루마기 해 입고 산 변두리쯤 앉게 두고

 

늙은 오리나무 숲 고사목으로 죽은 나는 누구인가. 똑바로 눕거나 앉지 못하는 성깔 무른 다래덩굴 칡넝쿨이 내 뼈와 마른 산 속에 전세 들어와 있다. 한 덩굴순은 시꺼먼 환한 허무를 넋 놓고 들여다보고 다른 덩굴순은 더 오를 길 잃어 낭패한 얼굴로 멈춰있다.

 

여름 내내 목 조른 저 증오의 손가락과 느끈들 어느덧 따뜻한 위무의 순과 넝쿨들로 녹슬어 삭는다. 너그럽게 용서하리 시월의 끝에 와 마른 생애들 푸석푸석 떨어지고 그렇다 본의는 아니지만 오래 숨겨 온 내 마음과 네 마음이 외로 휘감기거나 하반신 껴안긴 채 하나로 해탈된 편안함이, 정신의 얼개가 드러난다.

 

하늘은 새파랗게 산 변두리 배경으로 앉게 두고.

 

『사람이 사람에게』, 홍신선, 파란, 2016, 29쪽

 

 


 

 

홍신선 시인 / 상강

 

 

석축 틈이 불편해도 밤새 두 다리 오그린 채 틀어박혀

그 새끼 고양이는 운다. 울다가 잠시 생각하고

생각하다 다시 운다.

미아가 되어 이건 아니다 아니다 우는 걸까

어미는 어느 도랑 속 이미 구겨진 휴지처럼

횡사해 처박힌 건 아닐까

일체의 삶이 그런 거라지만

저도 이 낯선 세상에 들렀으면 새끼 품고

목덜미와 낯바닥이라도 샅샅이 핥아주고 싶었는데

결국 누군가 거들떠보지도 아는 척도 않는

이 차가운 돌 틈에서 어리둥절 혼자 울다

사위어 갈 마련인가

갓 난 그의 작은 몸뚱이는 부슬비 뿌리다 말다

뿌리다 말다 하는 상강 날 매지구름 같다.

이건 아니다 아니다 울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울다

막상 그 어린 게 목숨 반납하고 딴 세상으로 가뭇없이 돌아갔는지

오늘은 울음소리 지워진 내 쪽잠 머리가 되우 고요하다

아니 일대가 휑뎅그렁 황막하다.

이 전역이 참 이건 아닌 세상이

바로 그를 공모해 살처분한 공범들 아닐까.

 

시집『직박구리의 봄노래』2018. 파란

 

 


 

 

홍신선 시인 / 새우젓 육젓

 

 

광천 새우젓 토굴인 양 제 속에다 암굴을 파고

드럼통 묻는 이가 있다.

거기 들앉아 외골수로 곰삭은 것

내가 평생 시간의 갈피에 쟁여 발효시킨 것은

과연 무엇이었나

꿈? 혹은 희망?

(나이 들수록 그 이름 더 자주 불러 대는군)

켜켜이 안쳐 둔 허리 오그린 생새우들처럼

몸은 간국에게 다 벗어 내주고

통 속에서 숙성된 상큼한 맛깔과 냄새만으로

한 시절 더 낮게 낮게 무너져 내린 나는 정녕 무엇인가

모든 음식의 밑간을 맞추는,

맛들의 맨 밑에 깔리며

계란찜 호박젓국 김장 무생채에

천직인 듯 군말 없이 감칠맛 떠받쳐주는

나는,

 

이즘도 세상을 뒤적이다 보면 외진 갈피에

육젓 같은 누군가가 묻혀 곰삭는다.

 

시집『직박구리의 봄노래』2018. 파란

 

 


 

 

홍신선 시인 / 삶의 옹이

 

 

겨우내 따귀 떨던 풍설(風雪)의

그 가혹행위 담아낸 숙근초(宿根草)의 내공은 얼마나 얼얼한 것인가.

 

그 쑥대밭이던 난리 때 두세 집 건너 한 집 꼴이던가,

피 묻은 옷가지를 평생치 눈물로 빨고 헹궈낸 아낙들의 속념은 어떤 것인가.

 

여섯 달 만에 백골로 출현한 독거남 중장비 기사,

유서처럼 남긴 쪽방 허공엔

익명의 이 사회가 놓은 올무인가

달랑 그의 생을 옭아맨 머리칼 몇 올 느슨히 풀려있었다는데

 

마침, 워킹 코스의 너테 위에 엉덩방아 찧으며

골반 뼈 부서졌을 저 백수 늙은 햇볕은 또 비명을 얼마나 길게 삼키는가.

 

그만한 옹두라지는 누구에게나 삶이 극한에 이르러서야 단단하게 압축된 파일이라고

그만한 옹두라지는 누구에게나 먹먹한 이력들 압축한 콘텐츠라고

막 방한복 벗은 공원의 뭇 나무들은

되레 천연스럽다 못해 능청인데

 

칠 벗어진 벤치에 쭈그려 앉아

나도 오늘은

마음자리 확 내리받아 깔고

내 기억 바탕화면의 옹두라지나 압축풀기로 가만 검색할 것인가.

 

* 독거남 중장비 기사?사망 육 개월 만에 백골로 발견된 혼자 살았던 남자. 신문기사에서 가져옴.

 

 


 

 

홍신선 시인 / 자연, 다시

 

 

귀화식물 이국종 자리공의 훌쩍 큰

길 가웃 정수리께로 독판치며 감아 오른

수 수백 줄기의 토박이 환삼덩굴들이

가시 온통 묻힌 손으로 선산 전역을 움켜쥐었다.

상생을 얘기하며 무욕(無慾)을 소통한다며

간 여름내 이국종과 무슨 비밀모의라도 파하고 헤어진 걸까

얼기설기 얽힌 마른 덩굴들의 붕괴된 체제 밑에는

잔류한 개쑥, 바랭이, 고사리들이

왕조시절 외침(外侵)에 멸문한 가솔들처럼 질식사로 죽어 있다

마구 흩어진 내장, 마디풀의 토막 난 정강이뼈들.

힘 약한 목숨일수록 그렇게 도륙당하거나 더 주변으로 밀려나

개쑥도 변방에 오면

덩달아 제 둘레 더 약한 것들 압살하느라 기승이었는데

이들에게 좀 더 밀려난 군락 이룬 고사리는

입에 자물쇠 채우고 열쇠 아예 없앴는지

강익강(强益强) 약익약(弱益弱) 양극화를 열

쇳대란 없다는 듯 고동색 빈손바닥만 엉성하게 펴 보였다.

다만 땅 갗으로 숨어 기던 강소(强小)한 칡덩굴만 예외로

멀찍이 고개 갸웃 들고 외로 감아 올라

몇 년째 허리띠 매듯 나이테 졸라매고 선

나이배기 스트로브 잣나무 겨드랑이 아래까지 와

지금도 흔들거린다.

온갖 욕망들이 쉴 새 없이 기어오르고 내리는

떼 판 일군 환삼덩굴의 잔가시 말라붙은 손들이

마침내 움켜쥔 것 풀어놓는

이 선산 전역.

 

한참 때 야생만이 거기 있어

나는 한 필지 살벌한 자연을 다시 읽는다.

 

시집『삶의 옹이』(2014)에서

 

 


 

홍신선(洪申善) 시인

1944년 경기 화성에서 출생. 동국대 국문과 및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1965년 《시문학》 추천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서벽당집』(1973), 『겨울섬』(1979) , 『삶, 거듭 살아도』(1981), 『우리 이웃 사람들』(1984), 『다시 故鄕에서』(1990), 『다시 黃砂바람 속에서』(1996), 『자화상을 위하여』(2002), 『홍신선 전집』(2004) ,『우연을 점찍다』(2009)가 있고, 논문으로  『한국근대문학이론 연구』, 『우리 문학의 논쟁사』, 『현실과 언어』, 『상상력과 현실』등이 있음. 서울예대 강사, 안동대, 수원대 교수, 동국문학인회장 역임. 현재 동국대 문창과 교수로 재임. 동국문학상, 경기도문화상(1989), 녹원문학상(1982),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2002)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