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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신선 시인 / 가을 맨드라미
1
근본 한미한 선비는 다만 적막할 따름이다
이따금 무료를 간 보느니
2
긴 여름내 드높이 간두에 돋우었던 생각의 화염을 속으로 속으로만 낮춰 끄고 있노니
유배 나가듯 병마에 구참(久參)들 하나둘 자리 뜨는 텅 빈 가을날
_홍신선 『우연을 점 찍다』(360)에서
홍신선 시인 / 시월의 숲길에서
하늘은 긴 오후를 두루마기 해 입고 산 변두리쯤 앉게 두고
늙은 오리나무 숲 고사목으로 죽은 나는 누구인가. 똑바로 눕거나 앉지 못하는 성깔 무른 다래덩굴 칡넝쿨이 내 뼈와 마른 산 속에 전세 들어와 있다. 한 덩굴순은 시꺼먼 환한 허무를 넋 놓고 들여다보고 다른 덩굴순은 더 오를 길 잃어 낭패한 얼굴로 멈춰있다.
여름 내내 목 조른 저 증오의 손가락과 느끈들 어느덧 따뜻한 위무의 순과 넝쿨들로 녹슬어 삭는다. 너그럽게 용서하리 시월의 끝에 와 마른 생애들 푸석푸석 떨어지고 그렇다 본의는 아니지만 오래 숨겨 온 내 마음과 네 마음이 외로 휘감기거나 하반신 껴안긴 채 하나로 해탈된 편안함이, 정신의 얼개가 드러난다.
하늘은 새파랗게 산 변두리 배경으로 앉게 두고.
『사람이 사람에게』, 홍신선, 파란, 2016, 29쪽
홍신선 시인 / 상강
석축 틈이 불편해도 밤새 두 다리 오그린 채 틀어박혀 그 새끼 고양이는 운다. 울다가 잠시 생각하고 생각하다 다시 운다. 미아가 되어 이건 아니다 아니다 우는 걸까 어미는 어느 도랑 속 이미 구겨진 휴지처럼 횡사해 처박힌 건 아닐까 일체의 삶이 그런 거라지만 저도 이 낯선 세상에 들렀으면 새끼 품고 목덜미와 낯바닥이라도 샅샅이 핥아주고 싶었는데 결국 누군가 거들떠보지도 아는 척도 않는 이 차가운 돌 틈에서 어리둥절 혼자 울다 사위어 갈 마련인가 갓 난 그의 작은 몸뚱이는 부슬비 뿌리다 말다 뿌리다 말다 하는 상강 날 매지구름 같다. 이건 아니다 아니다 울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울다 막상 그 어린 게 목숨 반납하고 딴 세상으로 가뭇없이 돌아갔는지 오늘은 울음소리 지워진 내 쪽잠 머리가 되우 고요하다 아니 일대가 휑뎅그렁 황막하다. 이 전역이 참 이건 아닌 세상이 바로 그를 공모해 살처분한 공범들 아닐까.
시집『직박구리의 봄노래』2018. 파란
홍신선 시인 / 새우젓 육젓
광천 새우젓 토굴인 양 제 속에다 암굴을 파고 드럼통 묻는 이가 있다. 거기 들앉아 외골수로 곰삭은 것 내가 평생 시간의 갈피에 쟁여 발효시킨 것은 과연 무엇이었나 꿈? 혹은 희망? (나이 들수록 그 이름 더 자주 불러 대는군) 켜켜이 안쳐 둔 허리 오그린 생새우들처럼 몸은 간국에게 다 벗어 내주고 통 속에서 숙성된 상큼한 맛깔과 냄새만으로 한 시절 더 낮게 낮게 무너져 내린 나는 정녕 무엇인가 모든 음식의 밑간을 맞추는, 맛들의 맨 밑에 깔리며 계란찜 호박젓국 김장 무생채에 천직인 듯 군말 없이 감칠맛 떠받쳐주는 나는,
이즘도 세상을 뒤적이다 보면 외진 갈피에 육젓 같은 누군가가 묻혀 곰삭는다.
시집『직박구리의 봄노래』2018. 파란
홍신선 시인 / 삶의 옹이
겨우내 따귀 떨던 풍설(風雪)의 그 가혹행위 담아낸 숙근초(宿根草)의 내공은 얼마나 얼얼한 것인가.
그 쑥대밭이던 난리 때 두세 집 건너 한 집 꼴이던가, 피 묻은 옷가지를 평생치 눈물로 빨고 헹궈낸 아낙들의 속념은 어떤 것인가.
여섯 달 만에 백골로 출현한 독거남 중장비 기사, 유서처럼 남긴 쪽방 허공엔 익명의 이 사회가 놓은 올무인가 달랑 그의 생을 옭아맨 머리칼 몇 올 느슨히 풀려있었다는데
마침, 워킹 코스의 너테 위에 엉덩방아 찧으며 골반 뼈 부서졌을 저 백수 늙은 햇볕은 또 비명을 얼마나 길게 삼키는가.
그만한 옹두라지는 누구에게나 삶이 극한에 이르러서야 단단하게 압축된 파일이라고 그만한 옹두라지는 누구에게나 먹먹한 이력들 압축한 콘텐츠라고 막 방한복 벗은 공원의 뭇 나무들은 되레 천연스럽다 못해 능청인데
칠 벗어진 벤치에 쭈그려 앉아 나도 오늘은 마음자리 확 내리받아 깔고 내 기억 바탕화면의 옹두라지나 압축풀기로 가만 검색할 것인가.
* 독거남 중장비 기사?사망 육 개월 만에 백골로 발견된 혼자 살았던 남자. 신문기사에서 가져옴.
홍신선 시인 / 자연, 다시
귀화식물 이국종 자리공의 훌쩍 큰 길 가웃 정수리께로 독판치며 감아 오른 수 수백 줄기의 토박이 환삼덩굴들이 가시 온통 묻힌 손으로 선산 전역을 움켜쥐었다. 상생을 얘기하며 무욕(無慾)을 소통한다며 간 여름내 이국종과 무슨 비밀모의라도 파하고 헤어진 걸까 얼기설기 얽힌 마른 덩굴들의 붕괴된 체제 밑에는 잔류한 개쑥, 바랭이, 고사리들이 왕조시절 외침(外侵)에 멸문한 가솔들처럼 질식사로 죽어 있다 마구 흩어진 내장, 마디풀의 토막 난 정강이뼈들. 힘 약한 목숨일수록 그렇게 도륙당하거나 더 주변으로 밀려나 개쑥도 변방에 오면 덩달아 제 둘레 더 약한 것들 압살하느라 기승이었는데 이들에게 좀 더 밀려난 군락 이룬 고사리는 입에 자물쇠 채우고 열쇠 아예 없앴는지 강익강(强益强) 약익약(弱益弱) 양극화를 열 쇳대란 없다는 듯 고동색 빈손바닥만 엉성하게 펴 보였다. 다만 땅 갗으로 숨어 기던 강소(强小)한 칡덩굴만 예외로 멀찍이 고개 갸웃 들고 외로 감아 올라 몇 년째 허리띠 매듯 나이테 졸라매고 선 나이배기 스트로브 잣나무 겨드랑이 아래까지 와 지금도 흔들거린다. 온갖 욕망들이 쉴 새 없이 기어오르고 내리는 떼 판 일군 환삼덩굴의 잔가시 말라붙은 손들이 마침내 움켜쥔 것 풀어놓는 이 선산 전역.
한참 때 야생만이 거기 있어 나는 한 필지 살벌한 자연을 다시 읽는다.
시집『삶의 옹이』(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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