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순 시인 / 멈추지 않는 나무
언젠가부터 밤을 읽는 습관이 생겼어요
사람들이 사라져간 버스 정류장 내가 읽던 가을밤 열두 시의 페이지는 23쪽 지친 얼굴을 목 위에 매단 알바생은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그 페이지에 갇혀 목이 더 길어져
낮 동안 생채기 난 가지들이 위로를 주고받을 때 새들이 떠난 방향으로 병든 잎들 작은 유언도 못 남긴 채 떨어져내려
어지러운 소문을 뒤집어쓰고 도시를 돌아 나온 바람 내가 가진 별난 얘기를 나눠 줄게 한밤의 명치를 이리저리 흔들어댈 때
당신들이 아직 읽지 않은 오백 권의 시집만큼 뜨거워져
당신들은 심장에 박힌 무지개를 찾아 거리를 헤매고 나는 바람의 문장들 중 몇 개의 별점을 해독하는 중
은하수를 지키는 직녀는 옷감 대신 책장을 넘기며 죽은 새들을 살려내는 주문을 외고 있다네 직녀야 직녀야 네 이야기는 어디에서 다시 시작되니?
슬픔과 희망의 문장들은 일란성쌍둥이 운명 오십삼 페이지 얼룩진 자간에서도 서로를 찾네
정류장에 오래 머무는 실업자의 그림자는 주름진 밤을 뾰족하고 날카롭게 치대었던 냄새가 나
외로운 미물들이 눈물의 이유를 숨기는 이유는 입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따뜻한 입을 갖지 못한 고양이들이 거리를 부유할 때 나는 읽지 못한 수많은 페이지들을 상상해요 사실, 나도 내 페이지를 다 찾아 읽지 못했어요
밤을 읽는다는 건 흔들리고 흔들리는 것 고열 앓는 줄기와 뿌리를 지켜내는 것
당신들의 무관심에 어느 날 내가 다 뽑힐지도 모르겠어요 나의 해독법은 오류일까요?
웹진 『시인광장』 2021년 5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두현 시인 / 아버지의 빈 밥상 외 1편 (0) | 2021.08.10 |
|---|---|
| 김하늘 시인 / 고전적 잉여 외 1편 (0) | 2021.08.09 |
| 손음 시인 / 나는 창문을 기다린다 (0) | 2021.08.09 |
| 김인구 시인 / 고구마를 읽다 외 2편 (0) | 2021.08.09 |
| 김진돈 시인 / 비가 외 1편 (0) | 2021.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