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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돈 시인 / 비가
우산을 켠 채 난간에 기댔어
벽은 나를 지켜보고 있었어 비를 버리고 겨울을 떨어뜨리고 있었어
비는 부드러워, 비가 되어 깨져도 빗속에선 나쁘진 않았어
한 숨은 아무런 소리도 나진 않았어 비를 기다리는 나의 멈추지 못하는 이제
내 어깨는 삐뚤어지지 않았어 더 이상 표정도 보이지 않았어 한참동안 비가 한 뭉텅이씩 떨어져
리어카 밑으로 낡은 우리의 리어카가 지나고 쏟아진 비를 실은 비는 지워진 자들을 겨울보다 먼저 던져놓았어
내가 지워지고 겨울이 흐르면 겨울은 지워지고 비는 나를 그냥 버려두었어
김진돈 시인 / 눈사람
먼 과거에서 건너오는 전령이다 눈은
떠도는 생의 마지막 페이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전달 못 했던 한 덩어리의 말이 뭉쳐 있는 눈사람처럼
홍대입구에 싸락눈이 일렁거리는 것은 한때, 따뜻한 눈길에 어깨를 몇 번 기울인 적이 있기 때문일까
창문을 두드린다 너를 잊을 수 없다는 듯 포개지는 홑이불처럼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너와 함께 했던 푸른 대숲과 푸른 생각 그리고 붉은 꽃, 그 순간을 조금씩 견디면서 눈발이 떨어진다
아파트단지에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은 저녁이 젖고 불꽃이 아직 남이있기 때문일까 그러니까
눈보라가 들판을 돌고 돌아 너를 기억하는 동안 나선형으로 휘감기는 눈보라
점점 안으로 굵어지는 껍질 눈이 부풀려지는 시간
내 앞에서 아직도 눈발이 내리는 것은 외투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천천히 건너오기 때문일까
눈길을 무작정 걷고 걸었다 순간, 하얀 여우가 내 발가락을 덜컹 문다
꿈속에서 본 눈사람을 떠올리며 나는 끝나지 않은 불꽃을 따라 돌아가는 중이다 젖은 저녁이 휘파람을 불며 경계 없이 지나간다
"T.S. ELIOT< 황무지>에서
<시산맥> 2016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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