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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종호 시인 / 마라도에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9.

손종호 시인 / 마라도에서

 

 

풍랑은 끝이 없다.

부둥켜안아도

쓰러져 울어도

뱃길은 오히려 바람에 끌려

먼 바다로 사라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기가 끝이라고 말한다.

공화국의 비리도

분단의 상채기도

여기까지라고 말한다.

 

거칠게 무너져 오는

파도의 눈부신 붕괴를 보며

빚진 자들은 소리친다.

 

…갚아도(加波島) 좋고

…말아도(馬羅島) 좋고

 

이승의 녹슨 지느러미들이

발 아래 출렁이며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다.

 

그러나… 여긴 끝이 아니다.

잿빛 구름이

건초 속의 벌레라도 뒤지듯

낮게 드리우고

조랑말 몇 마리

역사의 뒤뜰 같은 고요 속에

풀을 뜯을지라도

여긴 끝이 아니다.

 

우러러 내륙을 보면

차라리 바람이 시작되는

뜨거운 핏줄의 시초

밀려온 울음들조차

더는 나아갈 곳 없는 절망으로 힘을 얻어

등대 하나 밝혀 선 땅

부둥켜안아도

쓰러져 울어도

오늘도

풍랑은 끝이 없다.

 

- 손종호, <마라도에서> 전문  <<한라의 저녁 마라도의 새벽>> 청하

 

 


 

 

손종호 시인 / 뿌리에 관한 비망록 · 1

 

 

1

1992년 여름, 금강을 거꾸로 접어올리며

우리는 저마다의 발원지로 향해 떠났다.

달빛 푸른 양산으로

구천동의 골짜기로 거슬러 거슬러 올라

결국은 갈참나무 너른 잎사귀에 뒹구는

이슬 몇 방울의 새벽을 보았다.

 

2

사과나무 씨앗에는 사과나무의 형상이 숨어 있다.

흘러가는 구름 속에는 누군가의 전 생애가 깃들어 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所)

 

채운산마루에 걸쳐

장엄하게 타오르는 놀빛이 내게 물었다.

 

3

과거는 흘러감으로 부질없고

오지 않는 미래는 강물에 비친

나리꽃 한 송이도 흔들지 못한다.

 

들숨과 날숨의 교차 속에

길은 오직 길로만 끝이 없다.

 

내 마음 위에는

바람 한 줄기도 얹지 마라.

흐르는 숨결조차 무시로 방향을 만든다.

 

4

---왜 하필이면 나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 왔는데

췌장암 선고를 받은 이우진집사가

서울아산병원 서관의 유리문을 밀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근원을 비추지도 못하면서

지상의 유리창들은 너무 투명하다.

 

5

새들은 허공을 놓아두고 산다.

별에 닿고자

구름에 머물고자 하지 않는다.

관여 없이 날개의 의식 없이

머무는 비행.

 

차를 두고 나온 오늘

천도 복숭아 예닐곱 개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오랜만에 아파트 앞 언덕을 오르니

별들의 처마냄새가 코에 닿는다.

 

 


 

 

손종호 시인 / 새벽 열차가 밟고 지나간 자리

 

 

미움은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잠못들게 하는 힘은 같다.

 

비수처럼 서늘한 초승달빛

내 온몸보다 크게 깨어 있는 밤

금간 술잔 같은 설움 위로

희디흰 바람이 담긴다.

 

기다리지 마라.

푸르렀던 오만,

단풍 되어 저무는 강기슭에 서면

용서하지 못할 목숨도

갈대꽃 되어 흔들린다.

 

새벽열차가 밟고 지나간

어둠의 자리,

비로소 귀를 여는 탱자나무잎,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기엔

이슬 속의 별빛이 너무도 멀고 너무도 맑다.

 

 


 

손종호 시인

1949년 대전에서 출생. 시인, 문학박사, 신학박사. 197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의 당선과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새들의 현관』외 다수 있음. 현재 충남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