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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라연 시인 / 물론
오래된 장롱 차마 못 버리는 그 마음 아세요? 장롱 문 양쪽을 떼어내어 이사한 아파트 대문으로 삼을까 해요
물론 다른 집은 첫 번째 문이 단단한 철문입니다 우리도 두 번째는 철문이고요
안방을 호령하던 시간들이 끝나고 문지기가 된 장롱의 신세처럼 우리 어머니와 조카 지숙이도 영구차에 실려 산으로 같습니다
누구든 걱정되는 얼굴이 있을 땐 비록 사물의 처지이지만 저 문지기조차 부러웠을 것입니다
지난날 서류 뭉치 보석 이불 옷가지 아무나 들을 수 없는 비밀한 약속과 고백
잡다한 걱정까지 나누던 팔다리였던 것 보셨잖아요
물론 격렬한 싸움의 폭력적 언사가 장롱에 새겨진 것도요
가깝다는 것이 얼마나 함께 아파하는 일인지 또한 새겼을 것입니다
박라연,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 ,창비, 2018, 28~29쪽
박라연 시인 / 지푸라기와 호들갑
막막할 때 가끔 동원되는 나 내 이름은 지푸라기
근데 왜 번번이 소용이 없을까? 으 응 간절함이란 게 대체로 자기중심적인 거잖아?
혹시 우주의 뇌와 사람 뇌의 사진이 유사하다는 말을 호들갑 너도 들은 적 있니? 으 응
그렇다면 사람은 모두 한 단락의 우주일까 우주와 사람은 부자 사이거나 부녀 사이? 그럼! 그럼!
그래서 우주가 마치 너의 일가친척인 양 떵떵거리며 호들갑으로 살았던 거야? 생태계에 빌붙어 연명하는 나 겨우 지푸라기인 내 앞에서 말이야
- <시와 사람>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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