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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라연 시인 / 물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9.

박라연 시인 / 물론

 

 

오래된 장롱 차마 못 버리는 그 마음 아세요?

장롱 문 양쪽을

떼어내어 이사한 아파트 대문으로 삼을까 해요

 

물론

다른 집은 첫 번째 문이 단단한 철문입니다

우리도 두 번째는 철문이고요

 

안방을 호령하던 시간들이 끝나고

문지기가 된 장롱의 신세처럼 우리 어머니와

조카 지숙이도 영구차에 실려 산으로 같습니다

 

누구든

걱정되는 얼굴이 있을 땐 비록 사물의 처지이지만

저 문지기조차 부러웠을 것입니다

 

지난날

서류 뭉치 보석 이불 옷가지

아무나 들을 수 없는 비밀한 약속과 고백

 

잡다한

걱정까지 나누던 팔다리였던 것 보셨잖아요

 

물론 격렬한 싸움의

폭력적 언사가 장롱에 새겨진 것도요

 

가깝다는 것이

얼마나

함께 아파하는 일인지 또한 새겼을 것입니다

 

박라연,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 ,창비, 2018, 28~29쪽

 

 


 

 

박라연 시인 / 지푸라기와 호들갑

 

 

막막할 때

가끔 동원되는 나

내 이름은 지푸라기

 

근데 왜 번번이 소용이 없을까?

으 응

간절함이란 게 대체로 자기중심적인 거잖아?

 

혹시 우주의 뇌와

사람 뇌의 사진이 유사하다는 말을

호들갑

너도 들은 적 있니?

으 응

 

그렇다면 사람은 모두 한 단락의 우주일까

우주와 사람은 부자 사이거나 부녀 사이?

그럼! 그럼!

 

그래서 우주가 마치 너의 일가친척인 양

떵떵거리며 호들갑으로 살았던 거야?

생태계에 빌붙어 연명하는 나

겨우 지푸라기인 내 앞에서 말이야

 

- <시와 사람> 2021년 봄호

 

 


 

박라연 시인

1951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 방송통신대학 국어과를 졸업. 원광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에 사는평강공주〉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생밤 까주는 사람 』,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빛의 사서함』등이 있음. 2010. 제42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문학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