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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늘 시인 / 고전적 잉여
아이스크림, 돌고래, 기도 내가 좋아하는 거야 지옥은 쓸쓸하다는데, 연한 잎처럼 새살이 돋을 때 이마에 얹힌 무능한 손과 영영 죽지 않을 속살이 있다면 순교자처럼, 오로지 네 힘으로만 걸어갈 수 있을까
여름이 끝나는 동안 원치 않는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하늘에게 나는 고백하기로 했어 서로가 서로를 몰라서 죄짓지 말자고, 단순한 섹스 스캔들이라고, 이번 생은 역시 NG에 지나지 않다는 걸
이것이 의아한 세계인 것이다
네가 있는 배경에 날 그려 놓고 꼴불견 광대처럼 얼굴에 색칠하고 웃었지 곱고 예쁘다는 얘기는 질리더라 맹세하는 게 좋아, 열정적으로 삶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어쩌라고, 난 나쁜 계집앤데 굿 걸, 이라는 소리는 좀 그만해 울지 않을 참이니까
기억이 눈을 멀게 하듯이 죽음과 상관없이 너무 우울해서 택시도 타고 동화책도 샀어 글이 사라지고, 재앙이 사라지며, 불공평했던 아름다움도 사라지는 걸까 쥐똥보다 못하던 내 삶이 조금 살만한 게 될까. 아니, 근데 아저씨 누구세요?
제 생업은 노동자고 본업은 미친년, 그게 나예요 비참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나도 마찬가지로 뿌리를 내려 늙어서 만져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시간 나며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도 좀 봐 생명이 어떤 건지, 그동안 얼마나 비천한 마음으로 싸워왔는지 그래, 너는 얼마나 겸손해졌니 사념으로 기록된 일기장은 어때 물고기처럼 숨을 참지 않아도 돼 그저 침묵할 뿐, 내내 상상되지 않는 비극이라서, 말을 하지 않을 뿐, 나는 좀처럼 정직할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구원이 필요해 이를테면, 죽어서는 몸을 벗을 수 있다는 가정(假定) 같은 것
<포지션 20년 겨울호>
김하늘 시인 / 장마
맑은 것들만 사랑할 때가 내게도 있었어 빛나는 알전구나 부드러운 새끼 고양이의 털 너의 봉긋한 가슴 같은 희망이라고 부를 만한 걸 세상이 예뻤고, 내가 예뻤어 뭔가를 사랑하는 일이 제일 쉬웠었지 너의 생각에 감탄하는 것도 너의 기억에 작은 뿌리를 내린 내가 기특했어 너의 심장박동 수를 세는 일이나 허공에 질주하는 마음까지도 근사해 보였으니까
긴 장마가 시작되던 해에 빵을 조금씩 뜯어먹으며 널 기다렸어 손톱을 깎고, 눈 화장을 하고, 높은 구두도 샀지 네가 사라질 거라고, 한 점 의심도 못 하고 떠돌이 개처럼 너를 기다렸어 나는 더 이상 미소할 수 없고 스스로를 곰팡이로 여기며 민감한 살덩어리가 되어 가고 있어
나를 놓지 않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나 희미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도, 점점 휘발되어 가는 내 영혼을 바라보면 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공원 같은 게 돼 오늘은 또 내 어디가 사라졌을까 이렇게 갉아먹듯 사라지는 동안 이 비도 멈추고, 너도 돌아오겠지 아마
김하늘, 『샴 토마토』, 파란, 2016, 106~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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