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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하늘 시인 / 고전적 잉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9.

김하늘 시인 / 고전적 잉여

 

 

아이스크림, 돌고래, 기도

내가 좋아하는 거야

지옥은 쓸쓸하다는데,

연한 잎처럼 새살이 돋을 때

이마에 얹힌 무능한 손과

영영 죽지 않을 속살이 있다면

순교자처럼, 오로지 네 힘으로만

걸어갈 수 있을까

 

여름이 끝나는 동안

원치 않는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하늘에게

나는 고백하기로 했어

서로가 서로를 몰라서 죄짓지 말자고,

단순한 섹스 스캔들이라고,

이번 생은 역시 NG에 지나지 않다는 걸

 

이것이 의아한 세계인 것이다

 

네가 있는 배경에 날 그려 놓고

꼴불견 광대처럼 얼굴에 색칠하고 웃었지

곱고 예쁘다는 얘기는 질리더라

맹세하는 게 좋아,

열정적으로 삶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어쩌라고, 난 나쁜 계집앤데

굿 걸, 이라는 소리는 좀 그만해

울지 않을 참이니까

 

기억이 눈을 멀게 하듯이

죽음과 상관없이

너무 우울해서 택시도 타고 동화책도 샀어

글이 사라지고, 재앙이 사라지며,

불공평했던 아름다움도 사라지는 걸까

쥐똥보다 못하던 내 삶이

조금 살만한 게 될까.

아니, 근데 아저씨 누구세요?

 

제 생업은 노동자고

본업은 미친년, 그게 나예요

비참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나도 마찬가지로 뿌리를 내려

늙어서 만져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시간 나며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도 좀 봐

생명이 어떤 건지,

그동안 얼마나 비천한 마음으로

싸워왔는지

그래, 너는 얼마나 겸손해졌니

사념으로 기록된 일기장은 어때

물고기처럼

숨을 참지 않아도 돼

그저 침묵할 뿐,

내내 상상되지 않는 비극이라서,

말을 하지 않을 뿐,

나는 좀처럼 정직할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구원이 필요해

이를테면,

죽어서는 몸을 벗을 수 있다는

가정(假定) 같은 것

 

<포지션 20년 겨울호>

 

 


 

 

김하늘 시인 / 장마

 

 

맑은 것들만 사랑할 때가 내게도 있었어

빛나는 알전구나

부드러운 새끼 고양이의 털

너의 봉긋한 가슴 같은

희망이라고 부를 만한 걸

세상이 예뻤고, 내가 예뻤어

뭔가를 사랑하는 일이 제일 쉬웠었지

너의 생각에 감탄하는 것도

너의 기억에 작은 뿌리를 내린 내가 기특했어

너의 심장박동 수를 세는 일이나

허공에 질주하는 마음까지도 근사해 보였으니까

 

긴 장마가 시작되던 해에

빵을 조금씩 뜯어먹으며 널 기다렸어

손톱을 깎고, 눈 화장을 하고, 높은 구두도 샀지

네가 사라질 거라고, 한 점 의심도 못 하고

떠돌이 개처럼 너를 기다렸어

나는 더 이상 미소할 수 없고

스스로를 곰팡이로 여기며

민감한 살덩어리가 되어 가고 있어

 

나를 놓지 않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나

희미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도,

점점 휘발되어 가는 내 영혼을 바라보면

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공원 같은 게 돼

오늘은 또 내 어디가 사라졌을까

이렇게 갉아먹듯 사라지는 동안

이 비도 멈추고, 너도 돌아오겠지

아마

 

김하늘, 『샴 토마토』, 파란, 2016, 106~107쪽

 

 


 

김하늘 시인

1985년 대구에서 출생. 2012년 하반기《시와 반시》 신인상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