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반칠환 시인 / 쌍봉낙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4.

반칠환 시인 / 쌍봉낙타

 

 

사막 어디에도

어매 묻을 푸른 들 하나 없어

사막 어디에도

아배 묻을 푸른 산 하나 없어

삼년상 치르고도 터벅터벅

제 등만 한 명당이 아직 없다고

봉분 둘 짊어지고 글썽글썽

 

ㅡ《표현》 2020 봄호

 

 


 

 

반칠환 시인 / 전쟁광 보호구역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 종일 전쟁놀음에 미쳐 진흙으로 대포를 만들고

도토리로 대포알을 만드는 전쟁광들이 사는 마을

줄줄이 새끼줄에 묶인 흙인형 포로들을

자동콩소총으로 쏘아 진흙밭에 빠트리면 무참히 녹아 사라지고

다시 그 흙으로 빚은 전투기들이

우타타타 해바라기씨 폭탄을 투하하고

민들레, 박주가리 낙하산 부대를 침투시키면 온 마을이

어쩔 수 없이 노랗게 꽃 피는 전쟁터

논두렁 밭두렁마다 줄맞춰 매설한 콩깍지 지뢰들이 픽픽 터지고

철모르는 아이들이 콩알을 줍다가 미끄러지는 곳

아서라, 맨발로 달려간 할미꽃들이 백기를 들면

흐뭇한 얼굴로 흙전차를 타고 시가행진을 하는

무서운 전쟁광들이 서너 너댓 명 사는,

작은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반칠환 시인 / 사마귀

 

 

직업은 망나니지만

모태 신앙이다

방금 여치의 목을 딴

두 팔로 경건히

기도 올린다

 

 


 

 

반칠환 시인 / 장어

 

 

수족관 장어들이 날렵하게 꿈틀거린다

평생 한 일 자 일획만 긋던 놈들이다

 

이제 일획도 너무 길어

탁, 탁, 탁

점으로 돌아가리라 한다

 

마침내 붓마저 버려야 얻는

절체절명의 도마필법을 얻으리라

저마다 설레어 웅성꿈틀거린다

 

저들이 써 온 일필휘지의 서첩은

고스란히 물 속에 남아 있다고 한다

강물에 강물을 찍어서 썼다고 한다

 

새들이 허공에 허공을 찍어

온몸으로 일획을 남기고 가듯

 

 


 

 

반칠환 시인 / 월식

 

 

돼지 우리 삼은 큰 궤짝 걷어차며

이놈 팔아 나 중핵교나 보내주지

거듭 걷어차던 시째 성 집 나갔다

대처 나간 성들도 소식 없었다

 

사진틀 끌어안고 눈물짓던 엄마는

묵판 이고 나가다 빙판에 팔 부러졌다

말 없는 니째 성 더욱 말 없고

말 잘하는 누나도 말이 없었다

 

겨울 바람은 왜 쌀 떨어지고, 옷 떨어지고,

땔감 떨어진 집을 더 좋아하나

연기 솟는 방고래, 흙 쏟아지는 베름짝이

무에 문제냐고 하룻밤 묵어 가잰다

 

마실 갔다온 엄마가 말씀하신다

이상한 일도 다 있지 마실 갈 땐 둥실하던 보름달이

슬슬 줄어들어 그믐처럼 깜깜터니

돌아올 때 그짓말처럼 환하지 않더냐

 

그게 월식인 줄 대처 나간 성들은 알고 있었을까

얼음보다 더 찬, 멍석보다 더 큰 그믐달이

슬슬 가려주던 우리 집 언젠가

그짓말처럼 환해질 줄 알고 있었을까

 

 


 

 

반칠환 시인 / 어머니 5

 

 

산나물 캐고 버섯 따러 다니던 산지기 아내

허리 굽고, 눈물 괴는 노안이 흐려오자

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 바라보신다

칠십년 산그늘이 이마를 적신다

버섯은 습생 음지 식물

어머니, 온몸을 빌어 검버섯 재배하신다

뿌리지 않아도 날아오는 홀씨

주름진 핏줄마다 뿌리내린다

아무도 따거나 훔칠 수 없는 검버섯

어머니, 비로소 혼자만의 밭을 일구신다.

 

 


 

 

반칠환 시인 / 누나야

 

 

누나야

다섯살 어린 동생을 업고 마실갔다가

땀뻘뻘흘리며 비탈길 산지기 오두막 찾아오던 참대처럼 야무진,

그러나 나와 더불어 산지기 딸인 누나야

국민학교 때

'코스모스 꽃잎에 톱날 박혀 있네

톱질하시던 아버지 모습 아련히 떠오르네'

동시를 지어 백일장에 장원한 누나야

나이팅게일이 되겠다고, 백의 천사가 되겠다고

간호대학에 간 누나야

졸업한 다음 시내 병원 다 뿌리치고 오지마을

무의촌 진료소장이 된 누나야

부임 첫날 다급한 소식 듣고 찾아간 곳 다름아닌

냄새 나는 축사, 난산의 돼지 몸 푸는 날이었다고

다섯 마린지 여섯 마린지 돼지 새끼 받아내느라

혼났다던 스물두 살 누나야

못난 동생 시인 됐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머리 쓰다듬던 누나야

병든 엄마 병들었다고 누구보다 먼저 친정 달려와

링거병 꽂고 가는 양념딸 누나야

이제 곧 큰 길이 나고 사라진다는 고향마을 중고개에

아직도 나를 업고 가느라 깍지 낀 손에

파란 힘줄 돋는 누나야

세상의 모든 누나들을 따뜻한 별로 만든

나의 누나야

 

 


 

반칠환 시인

196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1989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저서로는 시집으로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웃음의 힘』, 『전쟁광 보호구역』과 시선집 『누나야』 시평집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  『뉘도 모를 한때』, 꽃술 지렛대』 장편동화 『하늘궁전의 비밀』, 지킴이는 뭘 지키지?』 인터뷰집 『책, 세상을 훔치다』 등이 있음. 1999년 대산문화재단 시부문 창작지원 수혜. 2002년 서라벌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