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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연 시인 / 여름 비행
여기 구름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다 하얀 초파리떼 비행기 비상문을 열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주인 없이 흘러가는 덫 신과 악마의 비밀을 닦아내던 행주 종종 쉰내를 맡는 사람이 있다
매일 매일 정류장에서 새치기를 하는 사람 그는 마치 긴 줄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지나가는 그를 홱 꼬집을 수 없어서 나는 구름을 더올린다
구름 속엔 눈먼 초파리가 아주 많지 여름마다 박수를 치며 초파리 잡는 요령을 익히지만 그건 모두 덫 여기 굉음을 내는 덫이 있다
배수연 시인 / 두리안
둘이 안으로
뿌연 커튼이 숲처럼 빽빽한 왕궁으로
남자는 엉덩이에서 두리안을 꺼내 준다 이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뭉그러진 달콤함이다 나는 입가에 크림치즈 같은 두리안을 핥으며 망고스틴이나 람부탄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더 주세요 더
열린 창들은 수백 겹의 커튼에 부드러운 눈보라를 일으킨다
아가씨, 잠깐
둘이 안으로
눈보라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따뜻한 곳을 잡는다
두리안의 과육은 고단백이라 필리핀 신랑들은 약처럼 생각한대
남자는 열심히 두리안을 먹는 내게 왕관을 씌워 주고 나는 엉덩이에 더 많은 두리안이 열리길 바라며 지퍼를 올려준다
두리안은 겹이 많고 고약한 냄새와 뭉그러지는 달콤함
걸어가는 남자의 엉덩이 위로 왕궁이 무너지고 살이 부푸는 모습 왕관 위로 떠오른다
배수연 시인 / 여름의 집
여름의 집, 여름의 집 대문을 열면 코끼리 울음을 길게 우는 푸른 경첩
여름의 밤, 여름의 밤 식탁의 초들이 흰 여우처럼 목을 위로 길게 빼는 아아 여름의 밤, 여름의 밤
아브라함의 별처럼 미래의 편지들은 모두 너를 위해 쓰이고 우리는 자손이 없어도 행복하지
나를 모두 비워 너에게 줄게 아무리 비워도 허전하지 않고 나를 다 받고도 너는 나를 닮진 않지 너는 결국 우리의 마지막 페이지를 숨겨 놓았지만
우우우우
원숭이들은 밤하늘을 보고 아름다움을 알까 원숭이들은 서로의 목덜미에 불을 가져다 대는 놀라움과 슬픔을 알까
여름밤의 폭죽을 봐 울음이 결국 우주의 먼지가 되는 것을 별들은 폭죽에 눈이 멀어 검은 화약 덩어리가 되었어 너의 목에 떨어진 불덩이를 장마는 처마에서 기다리고
나는 밤새 장마를 받아 적어 아무리 크게 읽어도 너는 빗소리밖에 듣질 못하고
그래도 상관없지
나를 모두 비워 너에게 여름의 더위와 부패 속에서 나뭇잎들은 잎맥을 열어 초록을 흘리는 여름의 집, 여름의 집
배수연 시인 / 조이와의 키스
조이의 어금니 중 하나는 박하사탕일 것이다 나는 늘 그 안쪽을 열심히 핥아 주고 싶었다 조이네 집 아치 위로 무거워지는 장미 조이는 아침으로 무엇을 먹을까
*
나는 조이네 집 뒤에 서서 팔목을 흔드는 널린 이불 피로해진 그 애가 눈을 감으면 눈뜨는 오후의 티타임 졸린 조이는 테이블 위로 홍차를 쏟을 것이다 테이블보는 내 옆에 널릴 것이고 나와 태양은 숨은 얼룩을 다시 찾아낼 것이다
*
자주 물구나무를 서는 조이 다리 사이로 발목을 감싸는 매끄러운 얼굴 거꾸로 선 사이 신발 위로 구름처럼 흘러갔을 조이의 유년 나는 기억나지 않는 꿈속에서도 늘 그 시간을 베껴 그렸다
*
오늘 조이의 눈은 새 자전거처럼 현관에 기대어 있다
*
분명 키스를 아껴 두었을 조이 조이의 첫 키스는 아치 위로 핀 장미 꽃잎을 모두 떨어뜨릴 것이다 그 날이 다가오면 나는 빨랫줄에서 내려와 무척 하얄 것이고 조금은 지쳐 있을 것이다 우리의 키스는 조이가 매일 쏟았던 홍차의 테두리를 더 진하게, 진하게 그려 줄 것이다
조이와는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배수연 시인 / 우리들의 서커스
그대, 천막이 기울면 별을 녹인 물이 구두 속으로 흘러들었습니다 오소리가 흰 드레스 자락에 불을 붙였고 타는 불과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그대가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말들이 서커스단 코끼리 발 아래서 놀았고 나는 사자의 이빨에 줄무늬를 그렸습니다 스스로 누군가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무거워서 우리는 일부러 하품을 크게 했지만 한 번도 서커스 단원들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커다란 단지에 눈물을 쏟고 코끼리 여물을 삶았습니다 뜨거운 김을 쐬어 눈알을 씻으면 천막 밖으로 아직은 너그러운 바람과 누구도 보지 못한 짐승의 냄새 손바닥이 따뜻한 당신의 휘파람과 그래도 가끔씩은 우리를 대신해 그네에 오르는 별들이 녹으며 싸르락싸르락 반짝였습니다
배수연 시인 / 닭은 알을 낳을 때
시원할까 아플까 쥐는 그런 것이 궁금했다 쥐는 도시에 중독되었다 저놈의 노인들도 평상도 없는 양로원에 중독되었다 효모빵과 실크로 된 샤워가운, 그런 건 섬에도 있다 꿈에서 쥐는 공모전을 거절했다 대단한 일이다 도시에선 끝없이 공모전에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용기를 자랑하기 위한 포트럭 파티 흔한 일이다 하나같이 닮은 쥐들 사이에서 흔한 일이다 하나같이 쓸쓸하다는 것 따라서 어떤 쥐도 한숨을 쉬지도 발작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쥐들은 실컷 먹는다 석회 껍질을 잔디 위로 던진다 잔디는 고독을 모르겠지 잔디는 거울을 보며 잔디는 돌일 수 없다고 외치지 않겠지 잔디는 많을수록 좋다 잔디는 똑같을수록 좋다 잔디는 완전히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쥐의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은 언젠가 하나의 좁은 시야를 갖기 위해 눈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도려낼 것이다 봐, 이것이 압생트다 압생트! 어느 쥐가 명화 속 정물을 뜯어왔다 쥐들은 압생트를 감상한다 코를 벌름거리며 아, 향쑥, 살구씨, 회향, 아니스의 향기… 이런 건 이제 여기 없지 화가와 압생트는 옛 도시와 같이 죽어버렸다 츱츱츱 쥐들은 꽁꽁 언 버터 같은 손바닥을 비비고 활주로처럼 수염을 뻗는다 새벽에 온 택배 박스엔 사무용지만큼 하얀 달걀이 있다 빨대를 꽂아 마시며 닭이 이걸 낳았다는 게 정말인가 닭고기가 되기도 바쁠 텐데 도시는 시원하고 도시는 아프고 도시는 간지럽고 도시는 죽는다 도시는 태어난다 타로점 공짜로 보고 싶으면 손! 모든 쥐가 손을 들었다 쥐는 그런 것이 궁금했다
계간 《시와 반시》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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