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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규정 시인 / 산역(山驛)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4.

서규정 시인 / 산역(山驛)

 

 

나무야 내 대가리는 온통 빗물이란다

어서 밟아다오

줄기차게 내리던 소나기도 그치고

막차로 온 사람들은 막차로 가는가

막장에서 나온 사내들은 윤이 날대로 나

갈아입을 어둠도 마땅치 않은 산역(山驛)

어디론가 이동하는 무리들은 지금 한창 욕설로 피어나선

세상이 넓다는 건, 몸 하나 똥으로 박을 자리를 찾아서

똥터 곁엔 틀림없이 샘터도 있을 것이니

모두모두 서둘러도 기차는 아직 오지 않는다

돌아보면 채탄과 매몰

그리움으로 캘 그 무엇이 남아 있어서

석탄처럼 시커먼 눈동자를 후비며 어디로 가는가

막장에서 나와 막장으로 흐르는

길고 긴 갱도 삼만 리

절망 쪽으로 가는 슬픔은 장화를 신고

희망 쪽으로 가는 기쁨은 슬리퍼를 신고라도 어서 가

기차는 레일을 신고

나는 초승달을 신다가

똥터를 찾아가는 몸들은

신발가게에 다시 들르지 않으리라는 걸

이 첩첩산중 태백의 하늘에 뜨는 별들은

거의 다 맨발이다

 

[시인세계]2003년 봄호

 

 


 

 

서규정 시인 / 탱자나무 여인숙

 

 

가시가 가시를 알아보듯

상처는 상처를 먼저 알아보지

맨살을 처음 감싸던 붕대가 기저귀이듯

쓰러져 누운 폐선 한척의 기저귀를 마저 갈아주겠다고

파도가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그 바닷가엔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여인숙이 있지

들고 나는 손님을 요와 이불로 털어 말리던 빨랫줄처럼

안주인이 더 외로워 보이기를

바다보다 더 넓게 널린 상처가 따로 있다는 듯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손에 들고

탱자나무에 내려앉는 흰눈

모래 위엔 발자국

손님도 사랑도 거짓말처럼 왔다, 정말로 가버린다

 

 


 

 

서규정 시인 / 낮달

 

 

이 세상 최고의 그림은, 그림 밖으로 가끔 튀어나오기도 한다지

어느 드라마에선가

오마니 오마니를 몇 번 부르다 목을 푹 꺾던

소년병사의 윗주머니에서 살짝 빠져나온 숟가락처럼, 낮달이 떠 있다.?

 

 


 

서규정 시인

1949년 전북 완주에서 출생. 김제고등학교 졸업.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황야의 정거장>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황야의 정거장』 외 3권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