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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규정 시인 / 산역(山驛)
나무야 내 대가리는 온통 빗물이란다 어서 밟아다오 줄기차게 내리던 소나기도 그치고 막차로 온 사람들은 막차로 가는가 막장에서 나온 사내들은 윤이 날대로 나 갈아입을 어둠도 마땅치 않은 산역(山驛) 어디론가 이동하는 무리들은 지금 한창 욕설로 피어나선 세상이 넓다는 건, 몸 하나 똥으로 박을 자리를 찾아서 똥터 곁엔 틀림없이 샘터도 있을 것이니 모두모두 서둘러도 기차는 아직 오지 않는다 돌아보면 채탄과 매몰 그리움으로 캘 그 무엇이 남아 있어서 석탄처럼 시커먼 눈동자를 후비며 어디로 가는가 막장에서 나와 막장으로 흐르는 길고 긴 갱도 삼만 리 절망 쪽으로 가는 슬픔은 장화를 신고 희망 쪽으로 가는 기쁨은 슬리퍼를 신고라도 어서 가 기차는 레일을 신고 나는 초승달을 신다가 똥터를 찾아가는 몸들은 신발가게에 다시 들르지 않으리라는 걸 이 첩첩산중 태백의 하늘에 뜨는 별들은 거의 다 맨발이다
[시인세계]2003년 봄호
서규정 시인 / 탱자나무 여인숙
가시가 가시를 알아보듯 상처는 상처를 먼저 알아보지 맨살을 처음 감싸던 붕대가 기저귀이듯 쓰러져 누운 폐선 한척의 기저귀를 마저 갈아주겠다고 파도가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그 바닷가엔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여인숙이 있지 들고 나는 손님을 요와 이불로 털어 말리던 빨랫줄처럼 안주인이 더 외로워 보이기를 바다보다 더 넓게 널린 상처가 따로 있다는 듯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손에 들고 탱자나무에 내려앉는 흰눈 모래 위엔 발자국 손님도 사랑도 거짓말처럼 왔다, 정말로 가버린다
서규정 시인 / 낮달
이 세상 최고의 그림은, 그림 밖으로 가끔 튀어나오기도 한다지 어느 드라마에선가 오마니 오마니를 몇 번 부르다 목을 푹 꺾던 소년병사의 윗주머니에서 살짝 빠져나온 숟가락처럼, 낮달이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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