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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변종태 시인 / 결핵 같은 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4.

변종태 시인 / 결핵 같은 시

 

 

허기진 시는 술로 풀면 되고

넋 빠진 무력감은 연애로 달래면 되지만

얼빠진 내 영혼은 무엇으로 달래나

허기지고 넋 빠지고 얼빠진

가난한 내 영혼이여,

 

나도, 나도

결핵병원에서 피를 토하며

생을 마감한 어느 시인처럼

미련 없이 가고 싶지만

가지 못하는 난

무슨 미련이 남았길래

냄새나는 오물만 내뱉으며

전봇대를 부여잡고 오열하는가

 

냄새나는 오물만 내뱉으며

시 같지 않은 시를 남기며

오열하는 너

몸부림치는 나,

 

예시원 | 2009년 시집 '아내의 엉덩이'로 등단, '다층' 통권 52호 게재

 

 


 

 

변종태 시인 / 초록섬

 

 

우도엘 다녀왔습니다. 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얼른 우도를 주머니에 넣고 와버렸습니다. 지도에서 사라진 우도, 집으로 오는 길은 축축했습니다. 바닷물을 뚝뚝 흘리는 섬, 우도를 잃어버린 바다가 꿈까지 찾아와 철썩거립니다. 우도를 내놓으라고 호통을 칩니다. 헌데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도 온데간데없습니다. 바다는 더 세게 으르렁거리고, 꿈자리가 사납습니다. 주머니를 뒤집어보니 작은 구멍 하나 나 있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어디선가 빠뜨린 모양입니다. 그래도 바다는 물러가지 않고 밤새도록 으르렁거립니다. 옆구리를 철썩철썩 후려칩니다. 지도에, 파랗게 출렁이는 바다에 초록의 사인펜으로 가만히 섬을 그려 넣습니다. 금세 파도가 잔잔해집니다.

 

 


 

 

변종태 시인 / 물수제비를 띄우며

 

 

바닷가에서 물수제비를 띄운다.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욕설을 골라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던진다.

수면 위를 미끄러지는 물수제비, 그 욕설의 의미들,

첫번째는 사랑이더니 두번째는 그리움이더니

세번째는 미움이더니 네번째는 이별이더니

다섯번 여섯번 일곱번……말줄임표로 미끄러지다가 물밑으로 가라앉는 단어의 의미.

내 욕설은 끝내 수평선에 못 이르고 익사하는가.

욕설의 물수제비를 띄워도 떠나버린 그대에게 이르지 못하는 내 욕설의 의미

 

 


 

 

변종태 시인 / 바다에는 뽈락이 살지 않는다

 

 

바다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

바다에는 바다라는 말만 살고 있다.

뽈락은 살지 않고, 뽈락이라는 말만 살고 있다.

장승포 여객선 부두 방파제에서

내가 드리운 낚시에 걸려 올라오는 것은

고기가 아니라,

뽈락이 아니라,

뽈락이라는 낱말일 뿐,

뽈락의 'ㅃ', 그것도 앞의 'ㅂ' 부분이 낚시바늘에 꿰어 올라오는

허탈함, 말도 가시를 한껏 날카롭게 세우고

내 손을 찌르려 겨냥하는

뽈락이라는 낱말

바다에는 뽈락이 살지 않는다,

여객선이 데모크라시 Ⅰ호가 떠나버린 뒤에는.

 

 


 

변종태 시인

1963년 제주에서 출생. 제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0년부터 《다층》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멕시코 행 열차는 어디서 타지』, 『니체와 함께 간 선술집에서』,『안티를 위하여』등이 있음. 논문 『미당 서정주의 초기시 연구-화자,화제,초점을 중심으로 』 현재 제주문인협회 회원이며  한국문인협회 회원. 현 계간문예 『다층』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