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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산 시인 / 만장
마흔아홉 줄에 소년 가장을 만들고 떠나는 그대에게 만장을 씁니다. 어린아이가 높이 들면 하늘까지 닿을 듯한 청대미를 그리며 만장을 씁니다. 그대 잘 가시게나 평생 이별 없는 곳에 편히 쉬다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에게 안부 전하소. 마흔아홉 자 문자를 보냅니다.
-황인산 시집,『붉은 첫눈』(삶이 있는 창)
황인산 시인 / 개심사 애기똥풀
개심사 들머리 애기똥풀은 모두 옷을 벗고 산다. 솔밭에서 내려온 멧돼지 일가 헤집는 바람에 설사병이 났다. 개중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얼굴 마주보며 괴춤만 내리고 쉬를 하고도 있지만 무리무리 옷을 훌렁 벗어젖히고 부끄러움도 모른 채 물찌똥을 누고 있다. 사천왕문 추녀 밑에서도 노스님 쉬어 가던 너른 바위 옆에서도 산길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노란 똥물을 갈기고 있다. 부글부글 끓는 배를 옷 속에 감추고 산문을 두드린다. 이 문만 들어서면 아침까지 찌들었던 마음도 애기똥풀 되어 모두 해소될 것 같다. 산 아래서부터 진달래가 산불을 놓아 젊은 비구니 얼굴을 붉게 물들인 지가 언제인데 절집 위 옹달샘 풀숲까지 노란 산불에 타들어 가고 있다.
황인산 시인 / 모과
새해 첫날 서랍을 정리하다가 모과 향에 취해본다. 작년 가을 향기 간직하고 싶어 넣어두었던 모과 늦가을의 햇볕도 쬐지 못하고 겨울 한밤을 지냈을 텐데 향기는 그대로다. 초록의 잎보다 먼저 농익은 얼굴로 가을을 맞더니 몸내는 그대로인데 군데군데 검게 탄 몸은 허깨비마냥 가벼워졌다 이제는 가치를 잃어버린 이름을 하나씩 지우며 나 또한 타들어가는 것이리라. 소중한 사람을 하나씩 잃고 육신도 가벼워지는 것은 가을을 준비하는 것. 욕심 가득한 서랍 가벼워지라고 모과 살을 발라내 차를 내어 마신다.
황인산 시집 '붉은첫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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