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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채수옥 시인 / 출근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5.

채수옥 시인 / 출근

 

 

골목들은

지하로 환승된다

 

전동차는 정거장마다

계단을 높이 쌓아놓고 떠났다

 

노란선 밖에서

한 떼의 눈보라가 흩어지고,

 

올라가고 내려가는

가방들 속에서

 

뱀 같은 길들이 흘러나와

발목을 끌고 가다

 

길고 서늘한 시작이다

 

-채수옥 시집,『비대칭의 오후』(시인동네)

 

 


 

 

채수옥 시인 / 신(神) 씨네 오렌지 가게

 

 

   오렌지라서 너무 오렌지 한. 계단 아래 오렌지. 길을 걸으며 오렌지. 오렌지는 창문이 아니고. 오렌지는 상자가 아니고. 오렌지는 슬픔이 아니고. 오렌지는 오렌지일 뿐. 오렌지 위에 오렌지 있고. 오렌지 아래 오렌지 있지. 빗소리 들으며 짓무르는 오렌지. 차별받는 오렌지. 밤낮 없는 오렌지. 무리 속 오렌지. 오렌지 밖 오렌지. 오렌지 속에서 태어나 오렌지 속으로 기우는 둥근 바구니. 질질 눈물 흘리는 오렌지. 입장을 밝히라고 강요받는 오렌지. 낯이 두꺼운 오렌지. 굳게 쥔 주먹으로 오렌지 하는 오렌지. 자정이 넘도록 칼을 물고 있는 오렌지. 아닌 것은 속 터지는 오렌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 못하는 오렌지. 냄새를 극복하는 오렌지. 껍데기에 집착하는 오렌지. 한쪽이 슬쩍 벗겨진 오렌지. 뒤돌아보다 굴러 떨어지는 오렌지.

 

어디에도 없는 오렌지. 어디든 있는 오렌지.

 

 


 

 

채수옥 시인 / 오카리나

 

 

그녀는 새를 키웠을 것이다. 날마다 깃털에 물을 주었을 것이다.

자신을 닮은 뜻밖의 목소리들이 무성히 자랐을 것이다.

 

입을 벌리고 자신의 말을 밀어 넣었을 것이다.

새의 몸통에 구멍을 뚫고 수시로 드나들었을 것이다.

구멍이 열리고 닫힐 때 마다 노래는 소음이 되었을 것이다.

 

치렁대는 치맛자락 끝에 새끼를 낳았을 것이다.

서로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새끼들은 알 수 없는 음절이 되었을 것이다.

 

대책 없이 입을 벌리는 새끼들의 입 속에

지렁이와 날 파리와 썩은 고깃덩이를 배불리 넣어주었을 것이다.

 

이게 오카리나냐

매일 밤 촛불을 들고 새에게로 갔을 것이다.

 

불 속에 갇힌 새는,

 

오카리나를 찢고 오카리나는 새를 벗고, 아무것도 아닌 채로

조류의 역사를 더럽히는 책이 되었을 것이다.

 

 


 

 

채수옥 시인 / 피 흘리는 원샷!

 

 

바다는 붉은 통속으로 함축 된다

 

고밀도의 공간 속에서 꼬리치다 밟히고 낚이고

탁!

머리가 잘려나간 줄도 모르고 한 번 더 허공을 향해

튀어오르는

 

저울 위에서 값이 매겨지는

고기의 무게보다 가벼운 나의 어법

일용할 나의 죽음과 너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원샷!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데

혀끝에 닿기 위해 비릿한 표정을 바꿀 필요는 없어

괴물이 되려면 통증 따위는 잊어

 

발목까지 내려온 가죽 앞치마가

싱싱한 죽음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을 때마다

너의 아가미는 닫히고 나의 비늘은 빛나고

 

잘게 썰어놓은 파도를 씹으며

치밀어 오르는 집채만 한 해일을 삼키며

너는 화장실에 다녀오다 지퍼를 올리고

 

손가락에 묻은 핏물 같은 초장 슥 닦으며

아직은 살아 있다고

전력으로 꼬리 흔드는 자갈치 회 센터 218호

 

입속에서 해초처럼 자라는 칼날들 뱉으며

수척해지는 심장을 오독오독 씹으며

다시 한 번 원샷!

 

 


 

 

채수옥 시인 / 톨게이트

 

 

혓바닥이 필요해

은밀한 속도로 미끌거리는 너의 혀를 내밀어 주겠니

 

망설이기에는 이미 늦었어 바지 속에 혀를 넣는 순간

되돌아가는 길은 지워지고 말아

 

네 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반복되는 리듬처럼 중독성이 강하지

호흡의 계기판을 조절하지 않으면

절정을 달리다 심장이 멎을지도

 

몰라, 흘러나오는 볼륨을 피해

고개를 젖히거나 손을 떼는 순간

흥분한 길들이 바퀴를 삼켜버리기도 하니까

 

어둠도 뒷목이 뻐근해 지나봐

담배 한 대 피우고 그만 자고 싶어

 

이쯤에서 네 혀를 돌려주고 쿨하게 오른쪽으로 빠져줄게

거스름돈은 몰래 따라 온 바람의 몫이야

 

돈이 아니면 터럭 한 올도 가질 수 없는 여기,

우선은 달릴 수 밖에 없어

 

 


 

채수옥 시인

1965년 충남 청양에서 출생. 동아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200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대칭의 오후』, 『오렌지는 슬픔이 아니고』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