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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정숙 시인 / 손톱
손톱을 깎는다 그믐달보다 가난해진 달의 모습으로 손톱이 떨어져 내린다 손끝에서 가장 멀리 나아가 가장 가까이서 나의 일상을 쓰다듬고 세상과 나를 이어주던 그들이 이제 여윈 모습으로 톡톡 소리 내며 떨어진다 하루의 길이가 자라고 또 자라나면 봉숭아 꽃물처럼 아릿한 추억도 할킨 상처 만들기에 그만 가난하고 비루해진 모습으로 톡- 톡- 떨어져 내린다
사공정숙 시인 / 상처에는 향기가 있어
잔디깎는 정원을 지나갈 때면 그 진한 풀 향기에 걸음을 멈춘다 집단으로 내뿜는 상처의 향기, 호젓한 산길, 무심히 꺾어든 쑥대궁이에 물씬하니 쏟아지던 존재의 향기처럼 가슴 속에 품은 상처 송진같은 눈물로 겹겹이 싸매어도 향기로 품어 나와 누군가의 걸음을 멈추게 할까 오래오래 품은 상처 내 몸의 일부 되어 한 알, 눈부신 진주처럼 아픈 향기 새길 수 있을까
사공정숙 시인 / 따로 함께하는 풍경
‘둘이 따로 함께’를 외치는 부부처럼 우리는 모두 제자리를 지켜야하나 보다. 산은 나무가 많이 우거져야 하고 사람 사는 곳에는 집들이 모여야 마을을 이룬다. 돌은 돌들끼리 모여 담을 두르고 흙은 밭을 만들어 작물을 심게 한다. 마늘밭의 마늘도 무리지어 함께 자라는 중이다. 이러한 질서가 무너져 뒤섞인 곳에는 잡동사니 폐허가 자리 잡을 뿐이다.
저 많은 돌들이 어디서 나왔을까. 타원형의 밭둑을 만든 돌무더기를 보면 적지 않은 양이다. 처음 저 밭을 일군 농부의 노고가 눈으로 다가온다. 쓸모없는 돌을 뽑아내어 울타리로 삼고 ‘네 자리는 여기란다, 함께 있으렴’하고 조근조근 일러주는 건실한 일꾼의 손길이 떠오른다. 그렇게 모인 돌들의 모습은 또 어떤가. 똑같은 크기, 똑같은 모양의 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공장에서 찍어낸 벽돌과 다르다. 서로 몸을 떠받치고 기대고는 있지만 숨 쉴 공간, 틈새가 보인다. 그 틈으로 바람이 통하고 풀씨가 날아와 자란다. 소박하고 여유로운 풍경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늘밭의 흙 알갱이와 돌담의 돌 크기는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이다. 특수 카메라로 관찰하면 바위처럼 보이던 큰 돌도 빛의 속도로 풍화되는 과정에 놓여있을 것이다. 어떤 지점, 순간에는 흙과 돌, 돌과 돌 사이의 차이란 분명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렇듯 평화롭게 서로 바라보고 서로 기대며 아름다운 공존을 꾀하지 않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살 수 없는지 내게 먼저 묻고 싶다.
문파문학 2017 봄호(43호) 발표
사공정숙 시인 / 행복해 지기 위해
한 번도 신의 장기판을 훔쳐본 적은 없었다. 흉내를 내 본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진달래 꽃길따라 책보자기 메고 다닌 시골 학교에서도 우연을 가르쳐 주진 않았다. 도시의 학교에서는 우연을 써먹지 못할 수학의 확률로 가르쳐 주었다. 우연히 누구를 만나고,사랑하고,헤어지고 또 누군가를 만나 기쁘고,슬프느라 시간이 지나갔다. 행복해 지기위해 나는 어느덧 우연을 기다리게 되었다. 두리번 거리며 살피게 되었다. 행복한 길로 가는 표지가 어디에 있나 시를 쓸 때도 어느 연, 어느 행에서 우연히 하나의 낱말이 혜성처럼 솟아나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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