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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충규 시인 / 허공의 만찬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5.

김충규 시인 / 허공의 만찬

 

 

수줍게 빛이 지상을 어루만지고 개구리가 뛰고 나무가 뛰고 짐승이 뛰고

허공에서 장례를 치른 나비들이 흐느끼며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날아가고

시궁창에 빠져 냄새를 풍기는 오래된 빛이 천천히 삭아 내리고

늙은 쥐가 오갈 데 없는지 제 발톱을 뜯으며 한숨을 내쉬고

 

울지 마, 곧 밤이 와 밤이 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여

저 허공에 성곽을 지으러 올라가야지 허공만이 유일한 안식처,

둥둥 허공으로 떠오르는 영혼들을 봐, 지상에서 고단했던 영혼일수록 더 가볍게 둥둥

나비같이 투명한 영혼은 제트기같이 빠르게 허공으로 올라가

개구리도 나무도 짐승도 허공에 가볍게 오르기 위하여 뛰는 연습을 하는 거야

 

빛이 수줍게 내려와 시신들을 수습하는 지극히 한가롭고 평화로운 이 세상에

만약 허공이 없었다면 어떻게 생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아, 허공이 없다는 상상만 해도 질식해버릴 것 같아

 

텅 비어 있어도 허공은 늘 만찬이야, 영혼이 맑아 날개를 얻은 생명들이

임대해 사는 곳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허공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머무는 평야

산 자의 눈엔 보이지 않으나 그곳엔 늘 만찬이 벌어지고 있어 즐겁고 가벼운 영혼들만이

그 만찬을 즐길 수가 있는데 지상에서 고단하게 살았던 영혼들만이 주연이 될 수 있는데

 

뛰고 뛰고 뛰는 소리들

허공에 오르기 위하여, 행복한 死後를 위하여

 

너도 뛰지 않을래? 우리 같이 뛰자.

 

 


 

 

김충규 시인 / 기억

 

 

날개를 떼인 잠자리는, 펄럭거렸다 기억으로 없는 날개를 펄럭거렸다

 

볕이 무척 뜨거운 날 밀폐된 무덤이 답답한 죽은 자는, 육체를 가졌었다는 기억으로

제 육체 사라진 줄도 모르고 뚜벅뚜벅 산길을 산책했다

 

어미가 객사한 줄도 모르고 새 새끼가 울먹거리는 숲,

 

내가 걷고 있는 앞쪽 길에서 전생의 내가, 내 육체를 수거하려고 걸어왔다

기억이라는 올가미에 묶여, 한생이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데 지루했는데 잘 됐다 싶었다

 

한순간,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면

훅 스치는 바람 같은 것이라면… 그런 생각이 불끈

깃털 무성한 나무들은, 얼마나 날아가고 싶으면 저리 긴 울음을 우는 것일까

한때는 나무였으면 싶어서 숲에 갈 때마다 부러워 나무를 껴안곤 했는데

나무들은 어떤 기억으로 생을 견뎌내는 것인지

스스로 말라죽는 나무는 그 기억 얼마나 끔찍했던 것일까

 

모든 생명을 죽음으로 인도하려고 하늘에 弔燈이 걸렸다

 

 


 

 

김충규 시인 / 생(生)

 

 

왼손잡이로 태어나 오른손잡이가 된,

내 생에 대해, 그것이 진보에서 보수로의 이동이 아니듯,

내 생에 대해, 딱히 뭐라 말 할 게 있나

 

아무도 모르게 숲 속을 서성거렸거나,

아무도 모르게 견딜 수 없는 정사를 꿈꾸었거나,

아무도 모르게 손목에 칼을 가져갔거나,

아버지도 모르게 밥에 독약을 섞어 식탁에 놓았거나,

그것이 현실이었는지 몽환이었는지,

그 경계 어디쯤인지,

기억할 수 없는데, 기억할 필요가 없는데,

 

비가 내릴 때

멍하니 빗속을 들어가 보기도 하는 건

전생에 혹 내가 비 오던 날 객사했던가? 의문을 가져 보는 정도,

어려운 책은 머리가 아파 간신히 서문만 읽고 버렸던 일이나,

심장을 빼먹고 싶은 여자가 있었으나 간신히 손 한 번 잡고 등을 돌렸던 일이나,

간신히 어른이 되었으나 태아시절로 전생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던 일이나,

 

어떤 일이나 물에 말아먹는 밥보다 소중했던 게 있었나 싶은데

지금은 다만 치통에 시달리고 있는 중인데

치과에 가는 일이 더 시급한 일인데

 

 


 

 

김충규 시인 / 물컹한 세계

 

 

빗방울들이 애무해준 지붕들 붉게 꽃 핀다

거기 있던 고양이가 화들짝 박제된다

빗소리가 아찔해서 땅속 수백만 개의 항아리가 우우 운다

땅 위에서 스며든 온갖 울음들이 채워져 숙성되고 있는 항아리,

꽃이 지상에서 필 때 그 뿌리를 울게 하는 것은 항아리가 가진 미덕,

많이 운 꽃일수록 향기가 더 진하다

되도록이면 울음을 참으며 살고 있지만 울어야 할 때는

사람의 몸도 항아리가 된다 깨져 있는 항아리를 보면

주체 못할 누가 한꺼번에 다 쏟았구나 싶어 서늘해진다

울고 있는 집들 사이로 그 울음에 감염된 고양이가 떨고 있다

지나가다 더는 발을 못 딛고 주저앉아 운다

쏟아지는 물방울들, 저 멈추지 않는 울음들,

허공의 울음이 지상의 울음을 건드리고

지상의 울음이 지하의 울음을 건드리는,

울음이 점점 더 깊어지는 저녁을 가진 이 세계는 물컹하다

물컹해서 아직은 살아볼 만하다

 

 


 

 

김충규 시인 / 바닥의 힘

 

 

갓 태어나 바닥에서 자란 사람, 갓 죽을 때 바닥에 눕는다 사람의 일생이란 무어냐, 한 문장으로 줄이면 바닥에서 시작하여 바닥으로 끝나는 것이다 바닥을 딛고 일어난 힘으로 걸었고 뛰었고 지치면 쉬었고 하고 싶으면 바닥에서 정사를 나눴고 병들면 바닥에 누웠다 지하역의 노숙자도 청와대의 대통령도 바닥에 눕고 바닥을 딛고 살아간다 제 아무리 떵떵거리며 살던 사람도 추락하기 시작하면 바닥에 닿는다 바닥은 추락의 마지막 지점, 바닥을 피해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해도 그곳에도 바닥이 있다  죽어 무덤에 대한 애착을 갖는 것도 바닥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바닥에 등을 댄다는 것, 그것은 바닥의 힘에 순응하는 것, 바닥이 등을 밀어 올려준 힘으로 오늘 내가 호흡을 이어간다 바닥이 등을 밀어 올려주지 않으면 영영 바닥에서 등을 뗄 수가 없다 호흡 정지, 죽음이다 생과 사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건 바로 바닥이다 바닥이 神이다

 

 


 

 

김충규[1965.11.1~2012.3.18]시인

1965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1998년 《문학동네》 하계 문예공모로 등단. 시집으로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천년의시작, 2002),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문학동네, 2003),『물 위에 찍힌 발자국』(실천문학사, 2006), 『아무 망설임 없이』(문학의 전당, 2010), 유고시집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문학동네, 2013) 등이 있음. 2012년 3월 심장마비로 타계. 계간 『시인시각』 발행인 역임. 제1회 미네르바작품상 등 수상.